제목: 보이후드 (Boyhood)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Richard Linklater)
개봉일: 2014년 8월 14일 (북미), 한국 개봉일 미정
장르: 드라마
<보이후드>는 정상적으로 리뷰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에겐 이 작품은 너무나도 개인적으로 다가오고, 그런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보이후드>는 소년의 성장기가 가지고 있는 애환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고, 이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중으로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보이후드>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 같은 배우들을 쓰면서 주인공인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의 성장을 다룬 작품입니다. 일단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전형적인 성장 이야기를 띄고 있어 실제 극의 전개는 스토리보단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또한 성장 이야기이면서도 가족을 제외하곤 메이슨이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등장인물이 적기 때문에 전체적인 플롯이 없는, 지극히 작가주의적인 전개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할만 합니다.
이런 명확한 목표없이 떠다니는 듯한 플롯은 마치 <프란시스 하>를 연상시킵니다. 실제로 <프란시스 하>와 같이 <보이후드>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작품이 아닌, 방황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며, 이런 느슨한 전개 방식은 링클레이터 감독이 의도한 바와 같이 하나의 미화되고 각색된 이야기보단 메이슨이 겪고 있는 삶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리고 이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현실감은 <보이후드>가 가지고 있는 공감적 요소를 극대화 시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당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해주세요"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의 일관성있는 기승전결이 완벽한 스토리가 아닌, 일화적인 에피소드로 가득찬 추억의 모음집일 것입니다. <보이후드>가 인상에 남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러한 추억의 본질을 확실히 이해한 듯한 전개방식입니다. 이에 입각하여 영화는 전체적인 플롯을 관객들에게 이해시키기 보단 끊임없이 새로운 에피소드를 소개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이런 전개 방식은 자연히 영화 내 사소한 디테일을 완벽하게 잡아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펼쳐집니다.
이런 완벽한 디테일들이야 말로 <보이후드>를 그저 좋은 영화를 넘어서게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는 거의 3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자랑하지만 무려 12년이란 시간을 담고 있기에 체감상으론 굉장히 빨리 진행됩니다. 그리고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추억'들의 디테일을 부각시켜 기억에 남게합니다. 영화는 보통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들(아버지가 집을 나간 날, 어머니의 두번째 결혼식, 첫키스, 첫 알바날, 등등)은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데요, 링클레이터 감독의 소소함을 부각시키는 연출로 인해 평범해 보이면서도 잊을 수 없는 영화로 남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수수한 모습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을 영화 내 존재하는 인물이라기 보단 오히려 자신의 가족, 친구들을 이야기를 보는 것만 같은 포근함을 줍니다. 이는 아마 링클레이터 감독의 연출도 연출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면서도 마음 속을 후벼파는 대사를 쓰는 그의 각본 실력도 그 빛을 발한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 대사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에 의해 영화는 비로소 명작으로 거듭납니다. 일단, 12년간 주인공을 연기한 엘라 콜트레인은 가족 환경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소년기를 겪는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메이슨은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면서 어딘가 발상이 특이한 소년인데, 엘라 콜트레인은 이를 완벽하게 잡아내어 아웃사이더는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붕 떠있는 존재면서도 가족 문제와 더 나아가 삶의 의미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방황하는 메이슨을 연기합니다. 또한 그의 누나 역이자 링클레이터 감독의 딸인 로렐라이 링클레이터도 오버스럽지 않으면서도 신빙성있는 연기를 (초반의 골때리는 코믹씬과) 함께 보여줍니다. <스쿨 오브 락>에서도 그랬듯이 정말 링클레이터 감독은 아역들과 작업하는데에 도가 텄나봅니다.
하지만 <보이후드>의 아역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매력은 다름아닌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12년을 담은 영화 답게 영화는 하나의 모습만 보여주지않고 그들이 세월에 의해 빚어지고 다듬어지는 유기적인 모습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리고 배우들의 이런 모습으로 인해 다른 어떤 영화보다 <보이후드>는 '성장'이라는 요소를 진실되게 전합니다. 배우들의 얼굴이 그저 늙어간다는 기믹에 매달리기보단 그들이 행하는 행동부터 그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소소한 디테일까지 완벽하게 보여준다고 할까요. 이는 아마 12년 동안 꾸준히 찍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배역들이 자신의 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때문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장'은 아역 배우들이 연기한 두 남매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머니 역을 연기한 패트리샤 아퀘트와 아버지 역을 연기한 이선 호크 또한 영화가 진행되면서 성장합니다. 특히 아버지 역을 연기한 이선 호크의 성장이 눈에 띄는데요, 그 앳된 얼굴의 이선 호크가 영화가 끝날 무렵 미중년의 마스크에 정신적인 성장 또한 보여주는 것을 보면 아역 배우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한 뭉클함이 마음 속에 생겨납니다.
이는 패트리샤 아퀘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혼란스러운 가족사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대표되는 여러 경제 위기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아이들을 부양하고, 또 자신만의 삶도 찾으려는 그녀의 어머니 연기는 비록 조금 더 캐릭터성이 확실한 이선 호크의 모습에 비해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영화 마지막에 가서 그녀가 보여주는 연기는 이미 어른이 된 관객들의 마음에 잊지 못할 한마디를 던져줍니다.
그리고 이 두 부모를 주인공의 시점으로 바라보면서 <보이후드>는 소년이 자신의 부모들이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묘사하여 소년기의 방황과 그 방황 끝에 어른이 되가는 과정을 진실되게 담습니다. 그러므로 <보이후드>가 다른 성장 영화들과 가장 큰 다른 점은 바로 주인공 뿐만 아니라 '모두'가 성장한다는 것에 있고, 소년의 시점으로 다른 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성장하게 된다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여태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무시한 사실을 스크린에 담으며 영화는 인공적인 느낌을 최대한 배제한 전개에 걸맞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렇게 성장이란 요소에 중점을 둔 <보이후드>는 러닝타임 내내 '세월'이라는 테마를 중점에 두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영화는 12년이란 시간을 압축했기에 자연스럽게 성장해가는 영화 내 인물들은 꽤나 빠른 페이스로 그 모습이 바뀌지만 영화 내엔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가 전무하기에 이들의 삶을 압축하여 관찰하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한 전개는 '세월'의 무상함을 부각시킵니다. 영화가 주는 이런 센티멘탈리즘은 가벼운 코미디가 여기저기 내포되어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무엇인가 씁쓸한 기분을 주기도 합니다. 이를 생각해보면 최근 그 어떤 영화도 <보이후드>만큼 '시간'이란 요소를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로써 이렇게나 탁월하게 사용한 작품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영화의 제작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처음 12년간 찍은 작품이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 사실 이것을 기믹이라 생각했습니다. 12년간 찍어도 스토리가 같다면 다른 배우와 분장을 써가며 1년 내에 찍은 영화와 뭐가 그리 많이 다르겠냐고. 하지만 <보이후드>는 오로지 12년 동안 찍은 작품이기에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와 테마가 더욱 잘 살아난 케이스라고 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는 하나의 '추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그 당시의 '순간'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12년간 촬영을 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를 볼 때만큼은 '추억'의 모음집이 아닌, '순간'의 나열로 받아들여지게 합니다. 영화가 끝나며, 메이슨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관객들은 비로소 여태까지 본 '순간'들을 '추억'으로써 뒤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링클레이터 감독이 야심차게 진행한 12년간의 촬영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입니다. 그리고 이는 <보이후드>가 다른 그 어떤 영화와도 차별되는, <보이후드>만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합니다.
한줄평: "감히 한 줄로 평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 이선 호크가 애들을 휴스턴 애스트로스 경기에 데려가 로저 클레멘스 덕질을 하는 것을 보면서 참... 세월이 흐르는게 느껴집니다. 분명 저거 찍을 당시 미첼 리포트 나오기 전일텐데. 감독도 분명 의도하지 않았던 장면이였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장면이야 말로 영화가 가지고 있는 테마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적어도 MLB 팔로우하는 야빠들한테는). 그와 함께 현재 휴스턴 상황과 비교하며 애도.
- 그와 비슷하게 오바마 선거 당시 장면 또한 비슷. 저도 그 때 친구들과 오바마 vs. 맥케인에 대해 엄청 이야기했었고, 제 주위 모두 오바마야 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스노든 크리.
- 캠핑은 아버지하고만 갔지만 마지막 캠핑은 막 만난 룸메이트와 함께 감으로써 비로소 혼자서 자연을 맞이하게 된 메이슨. 전 이런게 참 좋습니다.
- 패트리샤 아퀘트의 "난... 뭔가 더 있는 줄 알았어"는 잊을 수 없는 명대사.
- 비틀즈의 블랙앨범!
- 할 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쓸 수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거대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