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비행기에서 <거짓의 미로 Labyrinth of Lies>라는 독일 영화를 봤습니다. 제작년 토론토 영화제때 보려고 티켓까지 샀다가 시간잘못알고 못본 영화인데요 이제야 보게 되었네요.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을 주제로, 한 젊은 검사가 실존 인물인 프리츠 바우어(실재 재판을 이끈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검찰총장)의 지도 아래서 아우슈비츠 재판을 조사하며 SS 대원들을 독일 연방법으로 심판하려는 영화입니다. 올해 나온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여기서와는 달리 <거짓의 미로>는 주인공을 젊은 검사로 잡아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갈등과 그 사이에 존재하는 독일인의 과거에 대한 불편함을 관찰합니다.
사실 딱히 그렇게까지 특별한 영화는 아닙니다. "파시즘을 불편함을 핑계로 잊으려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는 여태까지 많이 있어왔고, 특히 최근 이보다 더 훌륭한 영화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망각을 주요 테마로 잡은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책 읽어주는 남자>라던가, 작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의 <이다>, 올해 개봉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가 영화적 완성도나 테마의 진솔됨은 <거짓의 미로>보다 훨씬 깊고 탄탄합니다.
하지만 <거짓의 미로>가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굉장히 대중지향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영화는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프리츠 바우어를 주인공의 지지자로 내세우고, 오히려 관객들에게 "불편함"이라는 요소를 할 수 있는 데까지 배제하여 내러티브를 끌고 갑니다. 예술 영화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다>라던가 불편함을 극대화 시킨 네오 느와르 장르를 기발하게 사용한 <피닉스>와는 달리 <거짓의 미로>는 어디까지나 교과서적인 미스테리 휴먼 드라마이고 주제가 아우슈비츠일 뿐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대중에 어필을 하면서 얻어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관객들을 가르치려 합니다. 이는 당연히 영화적, 테크닉적 특별함을 중요시하는 비평가들에겐 마이너스 요소이지만, 대중에게는 오히려 더욱 편안한 영화로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영화는 굉장히 유토피아 지향적인데, 실제 재판이 프리츠 바우어의 생각과는 달리 진행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재판받은 사람들은 언론에 의해 "누구나일 수도 있던 평범한 사람"이 아닌 "나치의 괴물"들로 포장되어 바우어가 원하던 대중의 리액션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영화 자체가 주제의 "관찰"보단 "이상"을 보여주는 데 더 중점을 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의 미로>는 아시아 홀로코스트가 잊혀지고 있는 지금 아주 중요한 영화입니다. 세대의 갈등을 넘어서 세대의 망각을 고발하고 하나의 이상적인 솔루션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대리만족적인 쾌감에서 벗어나 실질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 가에 대해 힌트를 주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미 나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아는 서부권에선 <거짓의 미로>는 역사 강의에 가까울 지도 모르지만, 아직 일제의 악행이 전혀 제대로 심판되지 않고 오히려 망각하려는 아시아 사회에선 이 영화는 역사가 아닌 현실입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서부권 비평가들에 비해 이 영화의 중요도를 높게 쳐주는 것일 겁니다.
물론 영화자체도 꽤나 잘만든 영화입니다. 재밌어요. 곳곳에 한숨쉬게 만드는 클리셰라던가 노골적인 메타포가 좀 그렇긴 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