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인생을 장편 영화로 만드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1. 나폴레옹과 그가 만든 시대 전체를 돌아보는 방법
2. 나폴레옹 인생의 한 순간을 디테일하게 보는 방법
3. 나폴레옹 인생에 중요했던 테마에 집중하는 방법
4. 어떻게든 모든 것을 하나의 영화에 집어넣는 방법
첫번째 방법은 아벨 강스의 1927년 영화로, 6부작으로 설계되었지만 결국 첫번째 작품만으로도 제작비가 감당이 안되서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두번째 방법인 보다르추크의 1970년 워털루는 고증에만 급급한 나머지 평론가들에게 영화적 완성도가 부족하다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네번째 방법이라면 스탠리 큐브릭이 평생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던 작품이겠죠.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은 세번째 방법입니다.
개인적으로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관계를 렌즈로 삼아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본 결정은 확실히 정답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나폴레옹의 업적에만 중점을 두면 그가 만든 거대한 시류에 영화가 삼켜질것 같거든요.
그리고 조제핀만큼 나폴레옹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도 없고요.
나폴레옹이라는 카리스마를 조제핀이라는 무게추로 밸런스를 잡아서 그런지 영화가 무겁지도 않습니다.
이 영화의 나폴레옹은 위대한 황제, 혹은 냉철한 군략의 천재도 아닙니다.
리들리 스콧은 어떻게든 나폴레옹의 내면의 불안감을 끊임없이 파고드려 합니다.
굉장히 많은 부분이 우스꽝스럽게 연출되어있고, 이는 확실히 의도된 연출입니다.
다만 나폴레옹을 무작정 힐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불안감을 덮으려 거대한 야심이라는 동앗줄에 바둥바둥 붙잡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멀리서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그런 삶을 담아냅니다.
호아킨 피닉스의 첫 황제연기인 콤모두스가 사이코패스였다면, 나폴레옹은 서투른 범생이 느낌입니다.
A24 영화에서의 그의 연기가 생각난다고 할까요.
자신의 결점 때문에 폭주하는 것뿐만 아니라, 결점 때문에 소심해지고, 짜증내고, 자신감이 없어지기도 하는 인간을 연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네사 커비가 연기한 조제핀도 흔하디 흔한 팜므 파탈이 아니라 여러 얼굴의 여자를 연기합니다.
불륜은 하지만 나폴레옹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나폴레옹을 내려다 보지만 존경할 수밖에 없는, 그런 복잡한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감정선을 기준을 삼아 영화를 보면 감독이 가고자 했던 방향은 정답이였다고 봅니다.
사실 이 관점에서 보면 전투 장면은 거의 없어도 무방했습니다.
영화에는 대충 5개의 큰 전투가 나옵니다만, 그중 2개는 짤막하게만 나옵니다.
비주얼적으로 보면 만족스럽긴 합니다. 머스킷 시절 전투를 다루는 영화가 CGI가 발전한 이후로 거의 없다보니 거의 독보적이기도 하고요.
전열보병 시대의 전투 장면은 왠만하면 깔끔하게 걸어가다 픽픽 쓰러지고, 포탄은 실제 당시 포탄보다현대 고폭탄에 가깝게 묘사되었는데
여기선 그런 것 없이 날것 그대로 나옵니다.
대포탄에 말이 맞아 즉사한다던가, 포도탄이 남기고 간 참담한 광경, 경기병대가 보병들을 유린하는 장면등
전투 장면 자체는 인상깊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원래 포병장교 출신이다 보니 당시 야포의 무서움이 굉장히 잘 표현된게 인상깊었습니다.
퓨리처럼 실제로 포를 쏘면 포탄이 날아가는게 보이니까요.
거기다 포를 쏠때마다 나폴레옹이 귀를 막는 장면은 위에서 말한 나폴레옹의 인간전 면모를 전투씬에서도 표현한것 같아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프랑스 기병대가 돌격할 때 영국군 연대가 사각 포메이션으로 일사분란하게 바뀌는 장면인데
이때 파노라믹 샷으로 그것을 병사들의 관점에서 보여주면서, 뒤에 기병대가 돌격해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살면서 여러 기병 돌격 장면을 봤지만 사실 이만큼 보면서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압박감을 본 것은 처음이더라고요.
버나드 콘월경의 샤프 시리즈에서 이런 기병 돌격을 생생히 묘사한게 있는데, 딱 그런 느낌이였습니다.
분명 실제 쓰인 기병의 수는 1970년의 워털루가 많았을 테지만요.
다만 나폴레옹의 전술적 천재성을 보여주기엔 좀 부족합니다.
아우스터리츠는 치밀한 첩보전및 나폴레옹이 연합군을 완벽한 함정에 빠트리게 유도한 유인전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다만 연합군이 호수에 빠져 죽어가는 장면은 정말 잘 찍긴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워털루 또한 (조제핀이 퇴장한 시점이라 스토리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많이 간략화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또 영화의 테마에 맞게 철저히 나폴레옹의 시점으로 전투를 보여줬으면 괜찮았을텐데
갑자기 웰링턴이 중요인물로 뜬금없이 나와서 전체적인 플롯과 많이 안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클라이맥스때 갑자기 주인공이 영국군이 되는 느낌이 날 정도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조제핀과 나폴레옹이 중심이 되는 서사상 클라이맥스는 라이프치히에서의 패배가 더 알맞았을거라 봅니다.
전체적으로 봤을때 영화를 위해서라면 고증은 과감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써
나폴레옹의 문제점은 고증이 아닙니다.
굉장히 멋진 장면들로 가득차있고, 전체적인 디렉션도 괜찮은데
장면들 사이 사이에 숨쉴 틈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휙휙 지나가고,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감정선이 훨씬 더 잔잔하게 흐를 수 있는 것을 너무 딱딱 끊은 느낌입니다.
거장이 찍은 장면들을 AI가 편집한 느낌이랄까요.
그런 의미에서 봤을때 개인적으로 감독판이 (만약 나온다면) 많이 기대됩니다.
킹덤 오브 헤븐은 감독판으로도 어쩔 수 없던 결점이 꽤나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근본적으론 킹덤 오브 헤븐보단 훨씬 괜찮은 작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