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내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국6때 돌아가셨는데, 5년이나 투병하다가 가셨다.
아버지라는 구멍이나 이별이라는 상처???
솔직히 가난이 더 문제더라.
차라리 교통사고 같은걸로 한방에 가셨다면...하고 생각할때가 있다.
그리곤 1년 후, 어머니 고향인 시골로 이사를 했는데 완전 답이 없더라.
공부하려는 학생도 없고 선생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의무감에 직업적으로 교실을 들락거리는 것 뿐이었다.
나는 절망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나의 미래에 걱정없이 가족들을 부양하고 먹고살만한 돈벌이 수단
즉 "생존수단"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무얼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주변 어른새끼들이나 선생새끼들은 하나같이 "공부"를 하라고 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가 모든 설명의 끝이었다. 아니 유일한 설명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공부해서 대학을 가는 것과 먹고사는 것은 뭔가 괴리가 있어보였다.
결국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누군가의 회사에 취직해서 월급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월급을 받으려면, 회사에 월급 이상의 기여를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로는 과연 회사에 기여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나로서는 굉장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공부와 대학에 대해서 이야기 했기 때문에 계산해보기로 했다.
당시 수능응시자는 년간 70만명
그중에 수도권 대학교 정원은 약 35,000명이다.
이 세상에서는 매년 오로지 35,000명만이 미래생존에 대한 보장을 어느정도 받게되는 것이고
나머지 665,000명에 대한 미래는 그려진 것이 없었다고 느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주변 환경을 돌아보았다.
학원도 보내주지 못하는 집안 형편에, 시골학교의 수능평균은 200점도 안되는 씹똥창학교였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비장한 마음을 다잡고
모두가 수능 200점을 맞는 학교에서 홀로 수능 360점을 넘겨서 서울권 학교를 가라고???
하지만 주변의 어른새끼들은 모조리 마약이라도 쳐먹었는지, 이런 기적같은 이야기를 당연한듯이 하더라
씨발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쌍하고 격렬한 어린시절을 겪은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내 부모가 나에게 수능 상위 5%에 들어갈만한 현실적인 투자를 한 것이 무어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사회가 등져버린 665,000명에 속할 수 밖에 없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다.
실패하는 665,000명이 하는 짓을 따라해봤자 나 역시 665,000명이 되는거다.
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격증에 대해서 별로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때 거의 모든 기초자격증을 땄다.
온갖 대회를(공부하는 것 빼고) 적극적으로 나가서 참여했으며, 이런 경험을 위해서 학교를 제끼는 것 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였다.
고등학생때는 아예, 교내 무슨 빽으로 지내는지 모를 박사과정을 진행중인 물리선생님이 있었는데
이 선생님의 논문대필을 해주는 역할로 마음껏 수업을 뺄 수 있었다.
물리선생님은 학생들과 대화가 전혀 없이 수업만 진행하고는 사라지는 사람이었는데, 물리준비실을 사무실처럼 꾸며놓고 컴퓨터와 노트북을 들여놓고 냉장고까지 비치해두곤 논문작업을 하셨던 분이고
나는 선생님들 추천으로 한번 문서작업을 도와 드린것을 계기로 기회를 잡아, 나머지 분량 전부를 작업해드렸다.
쓸데없는 잡지식들을 무자비하게 머리속으로 쳐넣던 시절인거같다.
덕분에, 고등학교는 1학년만 대충 출석하고, 나머지는 출석한것으로 되어있지만 들어가고싶을때만 들어갔다.
어자피 씹똥통인데 뭘...
물리선생님 문서작업을 대행하는 것으로 여러 상식들을 얻고, 일본어와 자격증 공부에 전념했으며
물리실 열쇠를 받아 아주 내 사무실처럼 사용하고, 각종 대회에 참여하기 위한 공구나 집기들도 전부 물리실에서 충당하였다.
하지만, 수업을 빠지는 것 보다, 665,000명과 같이 "실패하기 위한" 수업을 듣는 것이 더 불안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적어도 나는 결코 틀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군입대전에 완성단계의 일본어회화실력을 얻었고
직업학교를 가려고 했지만, 독학의 길을 소개받아 학점은행과정을 밟았는데
당시 보유한 자격증 만으로 전공점수 48학점이 채워지더라. 자격증으로 점수를 채우니 이번엔 산업기사 응시자격이 생겨서, 이것까지 붙고 보니 나는 단숨에 72학점을 깔고 시작한 것이 되어, 학사학위를 2년만에 수료하게 되었다.
나는 어디를 가도 내 학력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데,
무시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지만 내가 주목하길 원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다.
바로 치열하게 위기감을 느끼며 생존방법을 내 스스로 탐구하여 찾아내고, 끊임없이 한발자국씩 행동하였으며
결국 남들보다 더 많은 수업을 등록하고 더 치열하게 공부하여 2년만에 학위를 땃노라고
솔직히 내 학위는 자격증으로 채운 점수가 높아, 본과 학생들이 가진 지식과 내가 가진 지식의 괴리가 커서 불안감은 있지만, 내 근성의 증거라고 설명한다.
달라야한다.
지금도 역시 달라야 한다고 강력하게 느낀다.
학점은행 학위를 면접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