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가 야갤이니 발암주의
이토를 처단하고, 민족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안중근은,
사실 그의 삶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신화화되고, 성역화된 부분이 꽤 많다.
한국인의 반일의식 조장과 이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안중근의 삶 전반에 걸쳐 퍼져있는 몇몇 역사적 왜곡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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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썼다는 편지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유명한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하지만 사실 안중근과 조마리아 여사 사이에 편지가 오간적은 없었고, 다만 안중근의 동생 정근과 공근이
뤼순 감옥으로 면회를 가서 어머니의 말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 사형선고가 내려진다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깨끗이 죽으라' 는 것이었다. (양반가 클라스 ㄷㄷ해)
-안중근 평전, 황재문
이 내용이 당시 만주일일신문에 실렸을 뿐인데(이마저도 불확실),
정체불명의 편지 내용이 인터넷을 타고 돌고돌다, 무한도전 등의 예능 프로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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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구와 안중근은 한때 원수였다. 아울러 김구는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의 암살 계획도 세운 적이 있다.
김구와 안중근의 출신성분은 상이했다. 평범한 소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김구와 달리, 안중근은 황해도의 유서깊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동학년 농민운동 당시, 소년객장이었던 김구와 달리, 조선의 왕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안중근은 아버지 안태훈과 의병을 일으켜 동학군을 때려잡았다.
사이비 동학당에 맞서 부친 안태훈이 의병을 일으킬 때, 부친을 따라 출전하여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동학당을 무찌르는 공을 세우다."('활동연보')
아울러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토 히로쿠니)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하고,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신사에서 이토 히로쿠니에게 공개 사죄를 한다.
(당시 안중근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를 보여주는 방증)
이에 분노한 김구가 안준생을 죽일 것을 명했으며 실제로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는 대목이 <백범일지>에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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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중근은 한때 친일파였다.
안중근은 러일전쟁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승리를 바라는 친일적 행동을 이어간다.
러일전쟁 당시까지 안중근이 친일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안중근의사숭모회'나 안중근기념사업회에서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늘에서 한 마무리를 짓기 위해 동해에 떠있는 조그만 섬나라 일본으로 하여금 그 같은 강대국 러시아를 만주 대륙에서 한주먹에 때려눕히게 하였으니, 누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중략) 통쾌하다! 장하다! 수백년 동안 악을 자행해 오던 백인종의 선봉대를 북소리 한 번에 크게 부수었으니 가히 천고에 희귀한 일이요, 만국이 기념할 자취이다." (안중근, 러일전쟁 승리를 축하하며)
그는 외세의 침략 가운데 러시아를 가장 경계하였다.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백색인종’에 대한 경계심이기도 했지만
러시아가 한반도를 침략하게 되면 한국의 처지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남하하여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여순항을 군항으로 삼아 한반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는 한국이 자력으로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는 러일전쟁의 본질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싸움으로
또 한국을 침략하는 러시아에 대항하여 동양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이 대행하여 전쟁에 참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더욱이 러시아가 의화단 토벌을 이유로 한국 북부지방에 침투를 기도하자
한국 지식층에서는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한일 양국의 제휴 내지 연대를 통한 방어를 적극 모색해 갔으며,
그는 러시아를 도덕을 잃고 무력으로 경쟁하는 서양 세력의 대표로 인식하였으며 부동항을 얻기 위하여 동양을 넘보는 침략세력으로 규정하였다.
러일전쟁이 백인종 대 황인종의 대결로 부각되면서 인종주의적 전쟁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비단 안중근의 경우뿐 아니라 당시 계몽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 성향이라 할 수 있겠다.
-국민대학교 사학과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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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토의 죽음에 수많은 한국인들은 애도를 표했다. 반면 안중근을 면회한 한국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토는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각국에서 '현자'로써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심지어 조선에서조차 이토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고종은 일찍이 이토를 독일의 '비스마르크' 중화국의 '이훙장'과 더불어 세계 3대 재상이라 칭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땅에 상륙했을 때, 만세를 부르는 무지한 농군들이 있었을 정도.
이토의 암살 당시 수많은 조선의 관민들은 이에 경악하여 이토에게 사죄와 추도의 뜻을 보냈다.
11월 4일 이토의 국장에는 한국의 칙사 초정부 대표자 뿐만 아니라, 조선인 1만명이 참가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당시 한양인구 20~25만)
조선의 관민들은 이토의 죽음에 대해 단순히 '추도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안중근의 그 범죄에 대한 것을 '대신 사죄'하기 위해 전국의 13도 곳에 호소해 '도일 사죄 13 도인민 대표 임시 회의소'를 건립하기도 했다.
또 이토를 조상 묘 처럼 신으로서 모시는 운동이나 그의 동상이나 송덕비를 건립하는 운동까지 있었다.
반면 당시 , 뤼순 감옥에 투옥되었던 안중근에게 면회를 간 조선인은 단 한명도 없었고,
석방운동이라든지 하는 것도 일절 없었다.
일본은 딱히 안중근의 면회를 막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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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당시 각국의 유명 인사들이 안중근의 이토 암살에 대해 평가한 글이다.
“이토히로부미공은 일본의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정치가이다. 그의 한국 부임은 대단한 자기희생이었다.
이토공이 한국의 체계를 개선시키기 위한 계획안건들을 내놓았을 때 나의 마음은 요동쳤다.
거기에는 개혁, 공정, 알선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이 범한 모든 잘못된 체계들을 구제 시킬 것 같았다.”
<캐나다인 기자 흘레데릭·아서·막켄지 (1906년 런던·데일리 메일)>
“고결한 정치와 도덕을 중요시했던 진보적이고도 원만한 이토 총감에 의하여 한국인은 암흑 시대에서 벗어나 광명세계에 들어섰다.
그들은 과거의 오래 된 악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생명 재산이 확실히 보호되는 등, 모든 면에 있어서 3년간에 2배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조선에 머물던 선교사 랏드 박사>
“한국인이 공을 암살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슬퍼해야 할 사건이다.
공은 한국인의 가장 좋은친구였기 때문이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강경적인 태도로 한국에 임하자마자 일본은 의외의 반항을 만났다.
한국인들이 참혹하게 일본 거류민들을 살상했기 때문이다.
그 때 일본의 무단파 및 언론기관은 그 끔찍한 사건을 벌인 이들을 발복색원하자고 목청을 드높였지만
오직 공만이 온화방침을 고집해여 그 강경책이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정치는 철두철미하게 부패하고 있었다.
공은 올바른 개혁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일본 통치하에 있는 것이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자발적으로 깨닫게 해주려고
60세를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통감이라고하는 다난의 일자리를 맡았다.”
<독일인 엘윈·belts 박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한심한 사건이다.
공과 같은 대위인의 서거는, 일본의 손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 러시아의 손실이며, 한국의 대손실을 낳게 할것이 자명하다.”
<토우신 철도 장관 호르왓트 소장(하얼빈·웨스트니트크)>
출처:야갤
야갤에 있던 글인데 더 퍼지면 논란이 팡팡 터질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