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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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풍자쇼] 수취인불명 제사상 (0) 2019/02/04 PM 06:39

수취인불명 제사상

 

 

설이라고 엄마가 고기랑 생선을 사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일단 소고기, 부위는 홍두께. 겉으로 뿜어져 나오는 포스부터가 난 아주 질긴 놈이라고 온 육질로 표현하고 있어. 딴에는 망치자국이 있다 한들 더 무서울 뿐이지. 우둘투둘하게 패인 구멍만큼이나 씹기를 반복해야 할 거야.

 

그래, 산적도 맛있지. 근데 꼭 산적이어야만 하나? 질긴 것도 그렇거니와 너무 짜. 양념불고기나 목살, 삼겸살을 강력히 원하지만 엄마는 받아들이지 않으시지. 여기 나랑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 없어? 있지. 그래, 조상님도 보들보들한 고기를 좋아하실 거야. 치아도 안 좋으실 텐데.

 

그리고 생선. . 부산사람이라 어릴 때부터 생선을 접했지만 좋아하지 않아. 이게 까딱 잘못하면 비린내의 온상에 맛은 맛대로 가버린 요리가 될 수 있거든. 물론 예외인 녀석들도 있지만. 제주 혹돔이라든가 쥐치, 또 뭐야 갈치도 괜찮지. 갓 잡은 꽁치도 좋았어. 근데 이런 녀석들은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비싸거든!

 

근데 왜 제사상에는 민어 조기지? 이번에도 3마리나 사 오셨더라고. 제사 때마다 계속 먹어보지만 맛이 없던데! 조상님들 입맛이랑 나랑 이렇게 다른가? 허허, 군에서 조기튀김이라도 나오면 정말 끔찍했다고. 음식 남기는 타입은 아니라서 다 발라 먹긴 하는데 이건 좀, 아니었단 말이야! 싸구려라서 그래? 진짜 조기가 아니라서 그런 거야? 모르겠어.

 

그렇다고 제사상 차리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냐. 소중한 사람을 기억하는 자리잖아. 단지 남들이 하니까 그러려니 같이 하는 건 그렇지만. 제사상도 좀 맛있는 게 올라가면 좋겠고. ! 유언을 쓸 때 남길 게 더 있구나. 만약 날 기리려고 하거든 옥생관 짜장면을 올리거라.

 

사람마다 식성이 다른데 어떻게 제사상이 같을 수 있겠어. 내가 귀신인데 지금 같은 제사상이 올라온다? 진짜 빡칠거라고. 오징어튀김이랑 고구마튀김 몇 개 주워 먹고 과일 중에선 배나 한 조각 베어 물까. 남은 음식들 뭐하자는 거야. 괜히 음식 남겼다는 죄책감만 들고.아참, 나는 제사상 못 받지. 결혼도 못해, 자식도 없을 거니까.

 

근데....지금 와서 생각난 건데.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며, 외할머니며. 뭐를 좋아하셨는지 모르겠어. .... 미처 여쭈지 못한 거야. 이런 놈이 제사상이 어떻다 저쩧다 말하고 있었으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아직 기회가 있는 사람도 있을 거야. 당장 여쭤보자. 이번 설에.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닭을 좋아하셨던 거 같아. 할머니집에 갈 때면 부평동 시장에서 양념통닭을 사주셨거든. 내가 잘 먹어서 사오셨을까? 본인은 드셨는지 기억이 안나. 나 하나라도 더 먹으라고 남겨주셨나. ... 기억이 안나.

 

그래도 싫어하시진 않았던 거 같아. 튀김옷이 없는 시장양념통닭은 씹기에도 편했지. 나 편하라고 외우기 쉽게 크리스마스날 돌아가셨어. 올해부터 그 날엔 양념통닭을 먹어야겠다. 다른 분들이 섭섭하시겠지만 할머니 외에는 다 잊혀져버렸네. 그저 생전 모습만 어렴풋 기억 날 뿐.... 증조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양념통닭은 다 좋아하시겠지? 그래,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뜻깊은 날이구나.

 

아잇! 제사상 이야기에서 어쩌다 이렇게 왔지. 설날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원래는 가족해체를 주장하며,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들먹이려 했단 말이야! 이건 내일 써먹어야지. 아무튼 좀 무거운 이야기가 돼서 미안해.

 

새해 건강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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