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종의 변
어릴 때 집이 보수동이었어. 부산 보수동책방골목이라고 들어봤어? 자갈치는 들어봤지? 자갈치에서 좀 더 위로 올라오면 있는 곳이니 구경하러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책방골목이라곤 하지만 중고서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어. 꼬마가 가더라도 즐거웠지. 아, 책을 보러 간 건 아니고 그냥 눈요기 하러. 만화책이 엄청 많았거든. 애니 관련 일본잡지도 가득했고. 좀 두꺼운 건 대학생들 교재였고.
오랜만에 가봤는데 변했더라고. 뭐랄까, 책방골목이라기 보다 관광지라고 할까? 정작 책방은 많이 없어졌어. 카페나 음식점이 들어섰어. 어쩔 수 없지. 요즘은 교보며 YES24, 알라딘 같은 대형서점도 인터넷으로 바로 중고거래를 하니. 게다가 시내 한복판에 중고서점이 있기도 하고.
중고서점이라. 난 좋아. 싸게 살 수 있으니까. 근데 안 좋게 보는 분들도 있더라고. 안 그래도 어려운 출판계에 재앙이라는 거지. 대형서점들만 이득이고. 어렵네.
몇 년 전 중고게임 문제가 떠올라. 중고게임은 불법복제랑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주장부터, 중고가 왜 나쁘냐는 측까지. 치고 박고 싸웠지. 게임사들도 중고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어. 별의별 방법으로 중고유통을 막으려고 했으니까.
그 노력이 가상해서였을까, 요즘은 중고문제로 떠드는 걸 본 적이 없어. 중고 자체를 없애버렸으니. 이젠 CD고 DVD고 없지. 다 다운 받잖아. 처음엔 살짝 불안했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 꽉 쥐지 못한다는 게 좀 거시기 했으니까.
그러나 싸거든!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지. 그리고 편리해. 그냥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 음반시장도 비슷하지? 멜론, 지니, 벅스 같은 음원사이트에서 듣고. CD는 정말 좋아해서 소장용으로 구매하는 용도지. 아, 인기순위 집계 된다고 사재기 하는 분들 빼고.
결국 책도 비슷하게 갈 거 같아. 그래, 전자책으로 넘어가고, 가격이 싸지고, 대형 서점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출판사들이 늘어날 거야. 잠깐 이건 출판사에서 준비해야 되는 거잖아!
그저 중고서점 비판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출판사들은 신간 보호 기간이란 걸 주장하는데. 아잇! 지금 이게 현실성이 있어 보입니까! 1년 6개월 정도 신간을 중고서점에 올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건데. 어허. 환장하겠네!
종이인쇄업에서 갑자기 IT업체로 변하라니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어. 근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보수동 책방 골목 꼴이 될 거야. 책을 파는 곳이 아닌 과거의 유물이 될 거라고. 창작의 보호까지 생각할 만한 여유 넘치는 소비자는 얼마 없거든.
모르겠어. 창작의욕과 출판사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작가들은 무조건 출판사에 매달려야 하나? 아니잖아! 물론 종이로 팔랑거리는 도톰한 녀석이 세상에 나오면 뿌듯하겠지. 친구들한테 자랑 할 수도 있고. 그러나 그걸 자기만 본 다면? 아무 의미가 없어. 글도 누군가와의 소통이니까.
아! 그렇구나! 전자책의 시대에는 출판사가 필요 없구나! 그래서 책등에 불이 떨어진 거구나!
이제 마음 속 죄책감에서 벗어났어. 중고서점 이용한 죄, 창작의욕 꺾은 죄! 그런 죄는 없어! 단연코! 수많은 작가가 있고, 그들 중 많은 수는 그저 관심 받고 싶을 뿐이거든. 인세가 뭐야, 읽고 소통해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중고로 사준다? 절이라도 하고 싶어.
출판사 사장님, 신문기자님들한테 미움 받겠네. 에휴. 아잇, 이 입이 문제야! 출판사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다들 먹고 살긴 해야 하는데. 아니 그래도!
소중한 독자들에게 죄책감 주지 말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