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적혈 프로젝트
헌혈의 집! 학교 앞에 하나가 있거든. 요즘은 안 그러던데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헌혈하고 가세요! 라고 청순한 여고생들이 앞에 나와 있었어.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었지. 왠지 모를 미안함에 일부러 그 길은 피해 다니기까지 했고.
헌혈이 무서워서? 그건 아냐. B형간염 보균자거든. 사실 지나갈 때마다 말하고 싶어. 헌혈하고 가세요. 그럼요! 정말 하고 싶어요! 근데 의사쌤이 B형간염 보균자라고 헌혈하면 안 된다고 해요. 감염된 피라도 원하신다면 기꺼이.
일단 헌혈은 나가리야. 오히려 문제가 커져. 그 미묘한 시선 있잖아. 보균자. 에이즈 보균자? 짜증나게도 전파경로가 비슷해. 피로 전달되는 것. 에휴, 내 동정을 바칠 여성과도 콘돔을 써야 한다니. 아! 어떻게 고추에 러브젤도 발라보지 못한 놈이 간염이 됐냐고? 어....엄마가 보균자거든. 태어나자마자 찰싹 붙어버렸지 뭐야. 흑흑.
나도 모르게 쫄리게 된다니까. 통풍 때문에 병원에 갔을 때도 B형간염 보균잡니다라고 말할 때 의사쌤의 눈빛을 0.03초 스캔했어. 혹시 난잡한 놈으로 보지는 않을까 하고 말야. 묻지도 않았는데 엄마한테서 물려받았다고 굳이 터놓고.
아무튼, 오늘 주제는 이게 아닌데, 아잇. 내 하소연해서 미안해. 자. 난 헌혈을 할 수 없어. 그렇게 하고 싶은데도! 밥만 먹고 똥만 싸는 존재에서, 피라도 공급하는 게 어디야. 무너진 백수 자존심을 단번에 일으킬 만하지. 거기다 먹을 거며 문화생활비까지 받을 수 있다니. 아, 하고 싶다!
이 의지를 펼쳐야 해! 그래서 찾아봤지. B형간염자도 피를 뽑는 방법. 구글링에 기사를 뒤지고. 처음 찾은 건 성분헌혈이었어. 피 안에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등 많잖아. 여기서 특정 성분만 뽑는 게 성분헌혈이래. 이건 B형간염자도 할 수 있다는 인터넷 소문이 있더라고. 당장 헌혈의 집에 전화 했지. 따르릉. 성분헌혈은 B형간염자도 할 수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아뇨! 큰일 날 소릴! 못 해요! 절대 피 뽑을 생각하지 마세요! 도전 실패.
무슨 방법을 쓰든 간염 된 피를 남에게 줄 순 없어. 그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하긴 이 오염된 피가 돌고 돌아서 퍼지는 건 오히려 테러행위지. 근데 예전에 에이즈 걸린 사람 피가 돈 건 어떻게 된 걸까? 나처럼 그 분들도 헌혈에 대한 욕망을 참을 수 없어서 그랬나? 워워. 간염자들 얼굴에 똥칠할 소릴! 혹은 정말 몰랐을 수도 있겠지. 자기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걸. 그럼 못 걸러낸 혈액관리본부 잘못이네.
여기서 잠깐. 남에게 줄 수 없다면 나에겐 줄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그거였어! 나를 위해 내 피를 뽑는다! B형간염이든 에이즈든 무슨 상관이야. 내 피, 내가 맞겠다는데. 방법이 있더라고!
바로 냉동적혈구은행. 와우. 자기 피를 뽑아서, 냉동해서, 최대 10년까지 보관하는 판타스틱한 방법이지. 드디어 나도 헌혈할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만만치 않아.
우선 피를 영하 80도에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찾아본 바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딱 한군데야. 웟더. 난 부산사람인데, 안 되잖아? 왕복 KTX비만 해도 12만원! 피를 뽑을 때도, 찾을 때도 왔다 갔다 해야 한다니, 오우. 지방 사람은 웁니다.
보관비도 문젠데, 250씨씨 1팩을 5년 보관하는데 50만원이야. 보통 수술하는데 3팩 이상을 권장하니까 총 150만원. 허. 내가 직장인이면 눈 딱 깜고 맡겼지. 근데 난 백수잖아? 안 되잖아! 끄아앙.
돈 좀 있는 분이라면 권하고 싶어. 혈액형을 맞추고 RH +다 –다 따져도 내 피만 한 게 없지. 실제로 요즘 의학 대세는 남의 피 수혈은 최대한 줄이는 거래. 수술은 성공하더라도 뒤에 회복 속도나 부작용에서 차이가 난다네. 이 때 남의 피가 아닌 내 피는 이런 걱정이 없지.
재용이 형이나 부진이 누나는 이미 다 맡겨 놨을 거야. 넉넉하게 10팩 이렇게 보관해 두는 거 아냐? 그럴지도. 회장님, 아니 부회장님이고 대표이사님인데 항상 대비해 둬야지. 그래도 이왕이면 삼성가들은 백혈병 환자들을 위해 헌혈했으면 좋겠어. 누가 맞냐를 떠나서 자기 회사 직원이 병 걸렸으면 뭐라도 해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
또 하나의 가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