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배원이 되고 싶어요
내가 언제 요일 개념 투철하다고 했던가? 그 말 취소할게. 쌀 떨어져서 주문했는데 안 오는 거야. 택배추적 해봤지. 짜잔. 옥천 버뮤다 삼각지에서 멈췄습니다. 호메시! 아니! 시킨 지 이틀이나 됐는데 아직 안 오다니, 이게 나라냐!
...안 오는 게 당연했어. 오늘은 10월 9일 한글날. 공휴일! 어휴, 이 개념 없는 백수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결국 점심, 저녁 모두 오뚜기 오라면으로 때웠지. 오라면 먹어봤어? 난 불호. 너무 맵던데. 크흠. 잡담은 여기까지.
택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체국 집배원에 응시해 봤거든. 집에서 놀고먹을 바에 오토바이 타면서 공익을 실천해볼까 하고. 우선 사전조사부터 했지. 집배원, 얼마나 꿀인가? 결과는요! ...헬 중에 헬. 맙소사.
여긴 주 52시간을 밥 먹듯 어기는 곳이야. 평균 주 57시간! 이것도 그냥 들어난 것만 이래. 집배원 업무가 배달만 있는 게 아니거든. 배달만큼 빡치는 일이 있으니 바로 분류작업. 코호호. 내 눈을 믿을 수 없군! .그렇습니다. 따로 분류하는 인원이 없어요. 있어도 알바로 대충 때울까. 이러니 아침 일찍 출근해서 짐 정리하고, 퇴근해서도 내일 물건 체크해야지. 그럼 이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쳐주느냐? ..아니! ..너무한데.
또 하나 집배원 헬적화의 요소로 오토바이를 들어. 바이크를 타며 자유를 만끽하기엔 일이 너무 빡세. 미친 듯이 돌아다녀야 하지. 그러다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다. 오토바이라 다치면 바로 몸에 직격탄이다 이 말이야. 게다가 날씨 영향도 많이 받아요. 비오고 눈 내리면 어쩔 거야. 여름엔 쩌 죽고, 겨울엔 얼어 죽고. ...뭐, 앞으론 오토바이 대신 쪼만한 자동차로 바꾼다곤 하는데 언제 보급 될지 몰라. 그 있잖아. 1인승 전기차.
그리고 대망의 연대책임. 정점을 찍어. 택배량은 정해져 있는데 누가 한명 구멍 냈다? 남은 인원이 채워야 하지. 대타가 없어요. 그러다보니 동료한테 미안해서라도 휴가를 쓸 수가 없어. 부모님 장례식이면 모를까. 아파도 나가야 하는 거야. 눈칫밥 안 먹으려면.
이렇게 빡세다 보니 안타까운 죽음도 일어났어. 올해만 10명. 중노동에 시달리다 돌아가신 분들은 억울해서 어떻게 해. 어휴. 이렇게 힘든데 우정사업본부는 사람 안 뽑고 뭐하냐! ...그런데 말입니다....우체국 쪽에서도 이렇게 빡세게 굴리는 이유가 있어. 집배, 택배 쪽에서 계속 적자를 보고 있거든. 규모도 상당해. 올해 2000억 예상!
응? 택배업무는 늘어났을 건데 왜 이래? 물론 큼직하고 무거운 택배는 늘어났지. 그런데 편지, 고지서, 서류봉투, 이런 것들. 요즘 봤어요? 없죠. 카톡, 문자, 이메일로 보내는 시대가 온 거야. ..잠깐만요! 택배는 우체국택배가 제일 좋던데! 맞습니다. 그런데 돈 문제가 걸리면 이게 좀 달라져. 소위 가격경쟁력! 경쟁업체 CJ택배 같은 곳 봐. 인간을 갈아서라도 가격 맞추잖아. 죽을 거 같으면 추노하고. 없으면 또 뽑고.
그러니 뭐다? 집배원 문제는 우체국 문제만이 아니다. 택배 사업 전체를 뜯어 고쳐야 돼. CJ, 롯데, 한진, 로젠, 편의점택배 이런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헬이잖아. 알바 중 기피대상 1호, 택배상하차. 노가다는 하더라도 이건 하지마. 절대 하지마. 아무튼 하지마!
이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야. 여러분도 느꼈지. 이 헬의 근원. ...단 2,500원이면 받을 수 있는 택배비. 끄응. 당신은 이 땅의 택배노동자들을 위해 택배비를 더 내실 의향이 있나요? 최소한의 사람다운 환경을 만드는데 동참하실 건가요? ...끄응.....제 주머니 사정도 어려운지라....아잇! 어렵네!
아무튼. 우체국은 문대통령이 약속하기도 했고, 세금 부으면 되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어. 올해도 1000명 가까이 집배원을 뽑지. 하고 싶다면 당장 2종소형부터 따자. 오토바이 있는 분이라면 하루만 바짝 연습해도 합격할 수 있어. 어떻게 아냐고? 여기 보이십니까? 제가 바로 2종소형 소유잡니다. 학원비만 대면 다 따죠. 후르릅.
그래서 응시한 건 어떻게 됐냐고? ....지금 내 신분은 백수. 보시는 대로. 탈락! 심지어 면접에 혼자 들어갔는데도 탈락! ...지금부터 집배원 채용 탈락 썰 풉니다.
집배원 채용 별 거 없어. 필기 같은 건 없고 체력테스트만 통과하면 바로 면접이야. 체력? 다들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1분에 30개는 하잖아? ...못하면 좀 그런데. 자, 체력은 평소 기르시고. 이제 면접인데 복장은 자유야. 정장 입고 온 분도 있고, 사복 입고 온 분도 있고. 옷은 별 관계없는 것 같더라고.
내가 지원한 곳이 사하우체국, 금정우체국, 남부산우체국, 그리고 중앙동에 있는 부산우체국이거든. 이 중에 다른 곳은 경쟁자가 있으니 떨어질 수 있어. 그런데 부산우체국은...면접에 나 혼자였다고! 이상하게 옆에 분들이 체력에서 다 떨어졌어. 맙소사. 나의 독무대! 이제 나도 직장인 되는 건가!
..했지만 면접관의 눈은 정확했지. 대번에 알아차린 거야. 이 녀석, 진짜배기다. 방구석 은둔 외톨이. ..아니면 말야, 혼자 면접 본다고 너무 용감했던 것 같기도 해. 나 혼잔데 거짓말 할 이유 없잖아. ..지원 동기가 무엇입니까?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습니다. ..다른 일은 안 알아보셨어요? 사실 공무원, 공공기관 준비했습니다. 그렇죠? 보기에도 집구석에서 책만 봤을 거 같더라. 오!
그래서 떨어졌어. 당일 바로 발표. 이번엔 합격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와우. 대단합니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우체국에서조차 난 불합격이네? 그 날 내 인생을 다시 돌아봤어. ...응? 뭐, 이젠 괜찮아. 차라리 잘 됐지. 그 지옥 같은 집배원 생활과는 영영 사요나라 했으니. ...이 시국에! 바이바이.
난 못했지만 여러분은 할 수 있어. 백만 백수 군단이여, 행복 우체국 건설에 지원하라! ....뒷일은 책임 못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