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끌어 모아 지르세요
11월 마지막 일요일 밤, 어디 사무치게 잘 보내고 계신가! ..난 겨울 타나 봐. 어제부터 가슴이 싱숭생숭 해. 왜 이럴까? ..외로워서? 에이, 난 늘 혼자였기에 외로움을 몰라. ..한 가지 짐작 가는 건 있어. 바로, 지르지 못 해서, 블랙 프라이데이 때 소비생활 누리지 못 해서!
정말 이상해. 대개는 지름신 물리치면 기분 좋잖아? 난 합리적 사람이다, 교환 가치 가장 높은 현금을 지켜냈다, 블프 따위에 현혹되지 않았다. 미래를 위해 저축하자. 장하다, 내 자신! ..근데 올해는 이런 자기위로 1도 통하지 않아. 그저 비참할 뿐. 끄흑.
선택지가 없었어. 지를까 말까, 고민조차 할 수 없는 상태. 살아남기 위해 강요된 근검절약이지. 문제는 이따위 상황에서도, 꼭 필요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는 거야. 허세와 탐욕이 아닌, 철저한 분식회계 검토 끝에, 절대이성마저 질러라! 외치는 순간, 난 살 수 없어. ..여기서 오는 무기력증, 불면증, 우울증. 끼요옷!
...뭐가 그렇게 필요하냐고? 어..카메라 삼각대. 다리 지름 40미리, 무게 2.73키로, 75미리 수평계 갖춘, 300달러짜리 삼각대.(찰싹!) ...야! 이게 무슨 돈 낭비야! 비용편익 최대점, 그 뭐야, 그래, 파레토 최적 소비지!(찰싹!) ..상처 받았어.
방법이 없어서 그래. 나라고 그 우람한 녀석을 사고 싶겠니? ..왜, 달력 보면 구름이 개울물처럼 뿌옇게 흘러가는 사진 있잖아, 파도가 안개처럼 부서지는 장면, 혹은 해가 30초 만에 뜨고 지는 타임랩스를 찍으려면 셔터를 3분이고 5분이고, 어쩔 땐 12시간이나 열어야 돼. 그 동안 카메라는 단 1픽셀도 흔들리면 안 돼지. 이렇게 하려면 뭐다? 굵직한 삼각대가 받쳐 줘야 한다! 역시 남자 다리는 딱딱하고 묵직해야 한다!(찰싹!)
몇 번의 고생 끝에 얻은 교훈이지. 딴엔 이 몸께서도 삼각대 들고 산 정상 밟아 봤거든. 물론 1.5킬로 여행용 삼각대였지만. 핫. 말이 여행용이지, 이거 들고 언덕만 타도 죽어. 1.5리터 페트병 짊어지고 다닌다 생각해 봐. ..그럼에도 참았어. 끌고 온 보람이 있을 거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삼각대 전개, 셔터 온! 가즈아! ..는 개뿔! 여행용 삼각대는 산들바람에도 출렁이는 것이에요! 죄다 흔들렸네! 포토샵으로 살릴 수 없네! ..이 허탈함, 배신감. ..그래서 사고 싶은 거야. 튼실한 놈으로. 완전 필수품. 인정?(찰싹!)
뭔 얘기하다 삼각대로 빠졌지? ...아, 지를 수 없는 자의 슬픔. 이거, 그냥 놔두면 위험해. 특히 이성적 타당성, 자기합리화 곁들여 지면 주체할 수가 없어. 화병 걸린다니까. ..그럼 어떡해, 살 수밖에. 영혼을 끌어 모아서라도 일단 지르고 보자!
지금에야 이해했어. 부동산에 영끌 하는 분들. 그 분들도 나랑 같은 심정이겠지? 투기만 하면(찰싹!). 사기만 하면 오르는데, 한 달 만에 억이 뛰는데, 내 노후, 가족, 자식 미래가 걸렸는데, 질러야지! 지금 투기 안(찰싹!).. 투자 안 하는 놈이 바보다. 생활필수품을 눈앞에서 놓치고 있다. 꺼흑, 마이갓!
...에이, 돌려까기 아냐. 동감했다니까. ..물론 그런 건 있지. 너님들이 내 삼각대 사랑을 사치로 보는 것처럼, 나는 영끌족들을 한탕이라 본다. 에헴. ..그렇게 죽일 듯이 쳐다보지 마. 솔직히 맞잖아! 나랑 너랑 뭐가 다른데! 돈도 없는 주제에, 어머 저건 사야해!(찰싹!) 커헉.
아무렴 어때. 그래, 인생 지르자! 해봤자 미국처럼 서브프라임 모기지 맞기 밖에 더하겠어? 하우스푸어에, 떡락에, 절망에, 한강물 온도 체크에(찰싹!)..죄송합니다. 선 넘었습니다.
아무튼. 삼각대. 내가 사고 만다. 크리스마스 할인만 와 봐라. 웰컴투 잔고 빵 원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