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마지막 종이책들에게 헌사
내가 부산 보수동 출신이라고 말했었나? (끄덕). 책방골목으로 유명한 그 동네 맞아. 꼬꼬마 때부터 참 많이도 뛰어다녔어. 대학서적, 일본잡지, 애니 일러스트.. 그 영향 때문일까, 책을 좋아해. 읽는 행위를 넘어서, 책 그 자체를. ..단지 공짜라는 이유로 주워 담아오기도 했지. 그렇게 한번 손에 넣은 책은 팔거나, 버리지 않았어.
참, 왜 그렇게 신주단지 모시듯 했을까? ..글쎄, 자기최면 걸었거든.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지혜의 보배다, 신이 깃들어 계시다. 그러니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이걸 유식하게 애니미즘이라던가? (맞아.) ..후우. 그 신념도 어제로 끝이다! 웰컴 투 미니멀리즘! 다 정리해! 2달 안으로 방 빼라는 주인아줌마 불호령에, 내 무슨 토를 달리오!
가장 먼저 연락한 곳은 보수동 책방골목이었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예전 다 받아주던 책방골목이 아니었고요, 줄줄이 폐업에 사라질 위기고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입 불가! 크흑! ..추억으로 간직하기엔 시대를 너무 지나쳤나 봐. 보수, 아디오스.
이제 남은 건 대형서점. 중고분야에선 알라딘, YES24가 강세더라. 두 곳 다 인터넷으로 판매 가능 서적을 조회할 수 있어. 내가 또 누구야. 한권 한권 다 입력해 봤지. YES24에서 받는 책, 알라딘에서만 매매 가능한 책, 둘 다 받는다면 가격 더 높게 쳐 주는 곳 고르고 고른 결과, 두둥탁! ..팔 수 있는 게 5%도 안 된다! 살 땐 억 소리 내며 구입했던 전공서적? 1년만 지나면 휴지조각! 인문서, 자기개발서, 학습지, 미래예측이니 시사만평이니, 죄다 컷컷컷! ..더구나 소설, 고전, 역사서조차 최신판 아니면 취급 안 하더라고. 홀리 마마!
..그래도 이 시국에 헌책 매입해 주는 게 어디야. 택배로 붙일까 하다 낑낑 매고 직접 갔지. 허리 휘는 줄 알았다. 어쨌든, 하루 종일 분류 작업에, 서점까지 가는 인력에, 왕복 버스 2600원 투자해서 받은 돈은요! ..2만 2천 7백 원. 알라딘 2만 7백 원. 예스24 2천원.. 히히, 싸지도 않았는데 현자타임 오네.(짝!)
갖고 간 책 중에서 절반이 등외 판정 받았어. 그 자리에서 폐기처분 했지. ..아니, 접힌 부분도, 찢긴 부분도, 낙서한 곳도 없는데, 왜? ..이번에 처음 알았어. 오래된 책에서 나는 구수한 향기, 일부러 킁킁 맡았던 그 향기. 종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갈색 빛을 띄고, 캬하, 좋다. ..는 책 곰팡이었고요! ..나 그럼 이때까지 곰팡이 냄새를 좋아했던 거야? 맙소사. 이럴 줄 알았으면 오덕 물품 다루듯 가끔 알코올로 닦아 주는 건데..(유해한 거 아냐?) 사지 멀쩡한 걸로 봐서 인체에 치명적이진 않은 것 같아.
아무튼. 동네 책방에서도, 대형서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녀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근에 올려 봐.) 요호, 빙고! 마침 팔릴 만한 것들로 엄선해서 올렸지. 동네 주민들 반응은요! ..연락이 없다.. 그래도 김홍신 삼국지는 팔릴 줄 알았는데, 아니,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데 웬걸,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이 팔렸어. 뭐였게? (쉽덕물?) 에이, 덕스런 상품은 당근에 안 올리지. 어디 일반인 오염되게, 떽! (짝!) ..크흠. 무협지가 팔렸어. 군협지랑 반삼국지, 4천 냥 쨍그랑. 역시 책은 재밌어야 살아남는다!
이제 정말 갈 때 없는 애들만 남았어.. 헌책 수거한다는 데 여러 연락해 봤지만, 하나같이 아동도서만 취급하더라. 그러니 어째, 고물상! 사장님, 헌책 받습니까? 가지고 오이소! 오케이, 땡큐! 캬하하. 미리 폐지 줍는 경험 쌓고, 좋다 야.
여하튼. 아잇! 원래 오늘 주제는 종이 낭비하는 국회, 폐지 말아먹는 신문사 까려는 거였는데, 개인사 늘어놓느라 분량 초과했네. ..말 안 해도 알겠지? 보지도 않는 국회 보고서, 두께가 막 이래. ..인쇄 하자마자 동남아 폐지업체로 수출되는 종이신문, 나무야 인간이 미안해!
그런 의미에서, 본인은 앞으로 두 번 다시 종이책 사지 않겠소! 전자책? 그것도 안 사! 미니멀리즘! 뇌까지 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