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다한 졸업앨범
드디어 베이징 동계 올림픽 폐막! (...) 참, 난 월드컵이든 올림픽이든, 경기는 잘 안보지만 폐막식만큼은 본방 사수하는 편이야. 헤어질 때의 알싸함을 맛 볼 수 있거든. 코호호.
오늘 나도 인생에 폐막식을 열었어. (..?) 학창시절 졸업앨범, 정리했다! 기억할 사진은 스캔으로 뜨고, 스캔 뜬 사진은 구글포토에 올리고, 그 외는 쭉쭉 째서, 필름류와 겉표지는 일반쓰레기로, 내부 찰랑한 책자는 종이로, 싸그리 분리수거했어. (...)
내 18년간 역사를 정리하는데 채 30분이 안 걸리더라.. 생각보다 간직하고 싶은 사진이 없어! (...) 막 단체로 찍은 사진들 있지? 저질 해상도라 누가 누군지 구분도 안 되고, 의미도 없고, 다 버렸다. 그렇다고 어색하게 찍힌 증명사진들을 내가 보관할 이유도 없잖아?
몰라, 내가 남녀공학을 다녔고, 그래서 그 중에 몇몇 여학생과 사귀었다면! 그 여성분의 독사진은 따로 보관할지도 모르지만, (짝!) ..걱정 마시라. 이 몸께선 중학교, 고등학교, 군대, 장장 8년에 가까운 세월을 남정네들만 보고 살았다! 내가, 내가 억울해서 진짜! (...)
아무튼. 추리고 추린 결과, 무려 7장 밖에 살아남지 못한 거 있지. 유치원 때 미끄럼틀 타는 장면, 중학교 일어 선생님과 팔짱 낀 장면, 중학교 졸업식장 친한 친구 3명이랑 작별하는 장면, 고교시절 삼총사가 합심하여 부산모터쇼 누나들 사이에서 행복했던 장면, 마음 착한 오덕 집합소 원예부원들과 함께했던 장면, 졸업식 날 담임 선생님과 찍은 장면, 이게 다야... (6장인데?)
그, 1장은, 선생님 증명사진.. 초등학교 체육 선생님, 최** 선생님 사진을 남겼어. ..내 인생에 고마우신 은사님들이 많으시지만, 뭐랄까, 사랑에 가까웠던 분은 최 선생님이 유일할 거야.. 내가 전에 말했던가? 나도 선생님께 의지했지만, 선생님 또한 내게 의지했어. (..?) 그, 단체기합 줬다고 6학년 전교생이 선생님을 따돌린 거 있지. 어휴...
난 단체기합이 뭔지, 왜 애들이 반발하는지, 거창한 역학관계 따위는 전혀 몰랐기에, 바보같이 순수했기에, 다행히 선생님을 계속 좋아할 수 있었어.. 다 떠나서, 예쁘셨어! 머리 짧은 신세경! 마음은 얼굴보다 더 고우셨고! (...) 진짜야! 내 차마 선생님 사진 공개 할 수가 없어서 원통하다. (...)
선생님 사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선생님에 따라서는 본인 사진이 졸업앨범에 남는 걸 꺼리신대. 개인정보 침해니, 얼평이니, 성희롱이니, 악용되는 경우가 꽤 되나봐.. 후우.. 마음이 갑자기 무겁다. 나도 선생님께 스토커짓 민폐 끼치고 있는 걸까? (...) 아니지? 난 그저 고이고이 선생님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야.. (...)
아참, 원래 계획대로라면, 앨범 한 장 한 장 뜯어서, 조명 비춰서, 접사 렌즈 달아서, 카메라로 찍은 다음, 파일로 남길 작정이었어.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남기고 싶다, 앙! (...) 하지만 곧 포기했어. 귀찮기도 하거니와, 앨범 원판 자체가 저화소라 그걸 고화소 카메라로 찍는다 한들, 별 소용이 없더라.
아무튼.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학창시절로 복귀할 수 있다면, 난 졸업사진 따위 찍지도, 사지도 않을 거야. 추억을 담기엔 졸업앨범은 너무 획일적이고, 대량생산품이니까. 동녀배들, 인정? (...) 대신, 나 스스로가 찬란히 빛났던 모습, 마음으로 연결된 친구들, 평온한 장소, 그리고 사모해 마지않는 선생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남기고 싶어.. 진심으로..
그런데 어쩌나. 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걸. 너님들도 이하동문, 캬하하! (...) 그러니, 자라나는 급식들이여! 아직 기회가 창창한 이들이여! 후회만 남은 애늙은이가 충고하노니, 당신이 주체적으로 앨범을 만드십시오! 브라보치아노! (...)
이상, 방빼 공포증에 굴복한 나머지, 자투리 추억 공간마저 비워내기 바쁜 이의 하소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