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스타, 사진과 사람 사이
지스타 2일째, 살아 돌아왔습니다. 자기반성 겸, ‘찍새’ 입장에서 오늘 느낀 점을 풀어놓을게.
첫째, 밀리터리 코스프레는 전시장 입장조차 반려될 수 있다. ...군복, 총기가 보이면 바로바로 잡아내는 것 같아. 심지어 나도 검문 당했어. (,,?) 내 카메라 가방이 하필 국방색이거든. 거기다 모노포드니 뭐니 덕지덕지 달았으니, 자칫 총기류로 오해를 받았나 봐. 다행히 가방 까고 무사통과 했어.
둘째, 세상은 좁다. 날 알아보는 분이 계셨다. (...) 하이퍼그리프 부스에서 한참 사진을 찍고 있을 무렵, 사진사 한 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어. ‘트수 맞으시죠? 닉네임 ’디귿‘으로 시작하는?’ 난 첨에 트수가 트위터인가 해서, 난 트위터 안 쓴느데 해서, 아니라고 말씀드렸지. 그리고 몇 분 후, 트수가 트위치 시청자를 말하는구나! 나 진성 트수인데! 디귿? 도바람? 어?
아무튼. 어떻게 저떻게 내게 말을 걸었던 분과 다시 만나서 인사를 건넸어. 코스프레 모델 ‘슈마’님 팬이신 것 같아. ...내가 부끄러움이 많고, 대인기피까지 있다 보니 이거 점점 생명의 위험을 느껴. (...) 아잇, 찐따 히키코모리는 누가 아는 척만 해도 심장이 벌렁댄다고요! 난 자발적 다크템플러를 추구한다.
셋째, ‘슈마’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모르겠어. 슈마님 앞에서 셔터가 안 눌려.
슈마 님 하면, 작년 지스타 때 붕괴 스타레일 마치세븐스를 코스프레 하신 분 되겠다. ...정말 모르겠어. 왜 난 루아님 슈마님 앞에서 카메라를 들지 못할까? ...어제 잠깐 언급했던 대로 조명 때문인가? 아닌데, 조명 괜찮은데... 아니면 슈마 님 표정 때문인가? 트위치 방송 때와 달리 묵묵한 모습에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참고로 슈마 님은 방송에서 방긋방긋 잘 웃고, 쌍욕을 퍼부으며 엘든링 트리가드를 잡아. 흐음... 어쨌든. 큰일 났네.
넷째, 난 행사장에서 모노포드 못 쓰겠다! 걸리적거린다! 기동성 빵점! (...) 사실 모노포드야 이미 오래전부터 쓰질 않았어. 무겁고, 거추장스럽고, 그런데 이번에 왜 가져갔냐? 그야 혹시 모를 ‘무선동조’ 촬영을 대비해서, 조명 스탠드 대용으로 들고 갔어. 조명 스탠드로 들고 간 겸 겸사겸사 사진 찍을 때 써봤더니, 어후, 역시나 나랑 안 맞아! 앞으로는 조명 스탠드 대용으로나 쓸 거야! 혹시 로또라도 돼서 소니 400GM이 내 손에 들어온다면 얘기가 다르지. 그때는 덩치 큰 400GM을 드높이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모노포드를 쓸 테지만, 그날이 과연 내게 올까. 따흑.
다섯째, 손수레를 끌고 다녀보니, 장애인 여러분이 겪는 고초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 조금의 문턱도 겁나. 계단 나오면 눈앞이 캄캄해. 멀리 돌아가더라도 승강기를 반드시 찾아야지. 뿐인가? 지하철 개찰구마저 장애인 배려칸을 찾아야 해. 일반 개찰구는 폭이 좁아서 손수레를 통과시킬 수 없더라고. 버스마저 저층 장애인 배려 버스만 골라 타야 했어. 일반버스에 손수레를 밀어 넣기에는 너무 민폐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손수레 하니 오늘 난 시민의식을 얼떨결에 파괴해 버렸어. (..?) 지스타가 끝나는 오후 6시. 부산 센텀시티 지하철역이 인파로 바글바글했어. 그래서 경찰이 인원통제를 하더라고. 그렇게 장사진 사이에서 난 아무것도 모르고 손수레를 끌며 장애인 개찰구로 통과했어. 참고로 장애인 개찰구는 인원통제 반대편 한적한 곳에 있걸랑. 그렇게 유유자적 개찰구를 통과한 순간, 내 앞에 엄청난 인파가 날 쏘아보고 있더군...
그때서야 알았어. 어? 이거 뭔가 이상하다. 어? 이거 설마 지하철 대기줄인가? 어? 그럼 난 경찰 통제도 안 들은 놈이고, 줄도 안 선 놈이고, 그런 비양심적 인간이란 말인가? 어! ...이 자리를 빌어 머리 박겠습니다. 변명하자면, 진심으로 상황을 몰랐습니다.
여섯째, 일반인 코스어도 오신다! 의상 만듦새가 엄청나다! ...내가 본 바로는, 손오공? 그리고 엘든링의 미켈라, 용과 같이의 키류 카즈마를 코스프레 하신 분을 우연히 봤어. 그 중 미켈라 님과는 사진도 찍었지! ...예사롭지가 않아. 설마 일요일 코스프레 어워즈 출전하시는 분들일까? 호오...
일곱째, 아마추어는 운에 맡긴다지만, 그래서 연사를 갈긴다지만, 갈겨도 너무 갈겼다! ...행사 할 때마다 항상 하는 얘기지. 연사 좀 자제하자. 제발 무의미한 컷 수두룩 빽빽 찍지 말자. 괜히 메모리카드 용량만 차지하고, 선별하는데 골병들고, 어이!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어... 그나마 오늘은 연사를 억제하고 억제했어. 그래도 사진이 너무 많아. 이거 언제 다 손 보냐....
여덟째, 왜 행사장에 사다리를 가져오는지, 조금은 이해되는 날이었어... 이거 말조심해야 하는데, 자칫 잘못했다간 분란이 날까봐 겁나는데... (...) 그러니까, 복작복작한 곳에서는 사다리 안 쓰면 찍을 각이 안 나와. ...끄응... 점차 내 스스로 기준선을 낮추는 게 두려워. (..?) 내가 안 좋게 봤던 행동들을 이제 내가 하게 생겼으니까.
사다리 이해하지, 조명 스탠드 펴는 거 이해하지, 손수레 끌고 오는 거 이해하지, 점차 한계선이 뒤로 밀려... 아잇! 나 3대만 때려주라! (...) ...후우, 물론 난 지스타에서 사다리 안 쓸 거야. 조명 스탠드도 1인 촬영 아니면 안 펼 거야. 그냥 나 스스로 다짐이야. 내 기준이 과거와 달라지는 게 싫어서...
그런데 손수레는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손수레 없으면 그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끌고 다닐 자신이 없어. 게다가 가방을 들고 다니는 부피나, 손수레로 밑에서 끌고 다니는 크기나, 그게 그거다? (...) 진짜야! 내가 길이까지 쟀어! 내가 들고 다니는 손수레는 시장 카트야. 아주머니들이 장바구니 끌고 다니시는 거 있잖아. 바퀴 2개 달려서, 이 정도는 괜찮잖아! 제발 ...은, 변명만 늘어나네요. 머리 박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끝으로 아홉째, 방금 전에 언급했던 기준선, 행사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 에 대해, 과거의 난 그 중에 하나로 ‘플래시’를 꼽았어. 남들 다 찍고 있는데 뻥뻥 빛을 터뜨리면 어쩌자는 거야!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했었지.
근데... 난 오늘 플래시를 사정없이 터뜨렸어... 남들이 다 쓰니까, 별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어... 참... 플래시도 마찬가지야. 이제는 행사장에서 플래시 터뜨리는 거? 이해해! 이해가 돼! 나 왜 이렇게 변했지? 결국 찍새는 찍새일 뿐인가? (짝!) ...제가 그렇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아닙니다...
오리발 내밀자면, 몇몇 열악한 벡스코 실내 조명 아래에서,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서는 대책이 안 더라고.
어제 첫째 날, 플래시 없이 찍은 사진 봐봐. 시커매. ISO 100인데도 노이즈가 자글자글, 사진 품질이 형편없어. 내 충격을 받아서, 도저히 이대로 안 돼서, 오늘은 눈 딱 감고 플래시 터드렸어. 아무렴, 내가 지스타 아니면 언제 코스프레 모델을 찍는다고!
...대신 그나마 일말의 양심은 지키고자 TTL –3으로 찍었어. 물론 직광으로... 이 정도는 모델님 눈뽕도 안 되고, 다른 사진사분들 노출에 영향 줄 정도는 아니잖아? 피부 번들번들 거리지도 않고, 동굴효과도 없고, 앙? (...) ...아니니? ...죄송합니다. 혓바닥이 길었습니다. 머리 또 박겠습니다...
그럼에도! 대충만 봐도 사진 분위기가 다르잖아! 이런데 내가 플래시를 안 쓰고 배기겠니? 이건 양보 못 해! 벡스코 실내에서 촬영이 있는 한, 난 플래시 쓸 거야! 써야만 해! (...) ...라고 일장 변명을 늘어놨습니다... 빛을 터뜨려서 죄송했고, 죄송하고, 앞으로도 죄송합니다... 염치불구, 제가 보정 실력을 갈고 닦아서, 플래시 따위 없어도 되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는, 플래시 터뜨리겠습니다! (...) ...어쩌라고! (짝!) ...저도 어쩔 바를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상! 그래도 여러분에게 내 마음속 갈등을 풀어내니 몸이 좀 가벼워졌어. 후아... 원래라면 내일 토요일은 지스타에 안 갈 예정이거든? 표도 없고, 매진이고, ..근데 가야 할까? 야외무대에서나마 사진 연습해야 할까? 시간 널널하니 야외부스에서 게임도 즐기고? ...흐음...
여하튼. 그렇습니다. 지스타... 사진... 사람... 오늘은 먹먹한 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