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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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린풍자쇼] 장례식장을 다녀와서 (2) 2024/08/28 PM 09:51




장례식장을 다녀와서

 

오늘 지인 장례식에 다녀왔어. 만 62세, 아직 떠나기엔 젊디젊으시건만, 암 때문에 돌아가셨어.

 

어제 밤에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가슴이 떨렸어. 사실 난 그 분과 어중간한 관계야. 10년 넘게 알고 지냈으나 그간 연락한 적은 서너 번이 다였어. 그저 멀리서 존경하고, 감사하고, 그랬던 분이었어. 그런데도 걱정에 잠을 설친 이유가 뭘까?

 

내가 진심으로 그 분을 아껴서? ...아니면 난 이기심 때문에 걱정에 빠졌는지도 몰라. 이 더운 날 장례식장에 가야 하고, 부조를 내야 하고, 어려운 분들과 인사해야 하고, 초라한 내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하고, 그 과정이 무서워서 가슴이 철렁했던 걸까..

 

그래서 오늘 아침 당장 장례식장으로 갔어. 이왕 마주쳐야 할 상황, 아싸리 빨리 마주하고 싶었어. 결과적으로 민폐였다. 아직 조문객을 맞이할 준비도 못한 곳에 내가 들이닥쳤으니, 죄송할 따름이었어. 다행히 상주 분들이 날 따뜻하게 맞아주셨지만 말야.

 

식탁을 깔아 드리고, 쓰레기를 치워 드리고, 망자에 인사만 드린 후 장례식장을 떠났어. 그곳에서 내가 할 일이 없었어. 내가 거기서 무슨 말을 하겠어. 이제 갖 대학에 들어간 자제분에게도 내가 무슨 위로를 드릴 수 있겠어. 내가 자제분보다 생리적 나이야 더 많지만, 인생 경험은 더 짧게 살았으니까. 난 부모님을 떠나보낸 심정을 몰라, 난 어린아이야...

 

식사는 극구 사양했어. 주변 분들이 돼지고기 먹고 가라 하셨지만, 끝내 거르고 왔어. ...그야 나도 배가 고팠고, 돼지고기 먹고 싶고, 그렇지만 과거 내가 우리 할머니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결심한 것이 있거든. 장례식에 가면 밥도 먹지 말고, 술도 먹지 말고, 인사만 드리고 떠나자.

 

그럴 게, 난 할머니 장례 치르면서 조문객에게 식사 대접 하는 것조차 힘들었거든. 대접하랴, 치우랴. 인사 드리랴. 피로도가 장난 아니었어. 물론 분명 고마우신 분인데, 할머니 마지막을 배웅하러 와 주신 분들인데, 그럼에도 난 내 편의를 생각 했어.

 

뿐인가, 장례식장 안에 모든 것이 돈으로 보였어. 술도 돈, 반찬도 돈, 아주머니도 시간당 돈, 나무관도 돈, 접시 돈, 식기도 돈, 상복도 돈, 사망진단서 발급도 돈, 다 돈! 아깝다!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다! 조문객님들, 부조만 납부하시고 나가주시면 안 될까요! ...에휴, 쪼잔해도 너무 쪼잔했구나. 난 소인배야...

 

모르겠어. 하긴 장례식에 정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각자 사정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뿐. 그래도 돌아가신 분을 위해 모두 모였으니, 그 마음을 나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해.

 

그나저나 장례식장에 검은 양복을 입고 가려 했거든? 그런데 못 입고 갔어. 살이 쪄서 양복이 어깨춤에 안 들어가더라고... 할 수 없이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갔어. 나 무례한 걸까? 아니지? 장례식에 찾아 간 것이 중요하지? ...복장에 얽매일 게 뭐람!

 

이틀 후 발인.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운구 할 때 내가 들어드리겠다 그랬거든? 그런데 상주분이 그럴 필요 없다 하시더라고. 요즘은 장례식장에서 운구차까지, 그리고 운구차에서 화장장까지 기계로 시신을 운송한대.

 

잘 됐네... 오해하실라. 그러니까 내 말은, 이전에는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지인 및 친척이 대여섯 명 투입됐잖아? 요즘처럼 1인 가족화 된 환경에서 그럴 수 있는 가정이 몇이나 되겠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장례업체에 인건비를 줘 가며 운구해야했고, 이 얼마나 상주에게 죄책감 들게 하는 예식이니? 이런 행태가 앞으로 계속 될 수 없잖아? 그, 대충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느낌 오시죠! 이제 운구는 기계에 맡겨야 한다!

 

아무튼. 장례식에 다녀올수록 나도 조금은 어른이 되어가나 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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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의길님의 이러저러한 생각과 진심이 고인께 닿았을겁니다. 저는 장례식은 무조건 정장 + 반드시 식사 하고온다 주의 입니다. 풍신의길님이 써주신 바와 정반대죠. 정장은 TPO에 따른 최소한의 격식이고, 식사는 고인과의 마지막 식사라 그여깁니다. 이렇듯 각자 생각과 뜻이 다르죠 ㅎㅎ

사랑하는 친구를 보내던 날의 육개장은 제가 육개장을 먹을 때마다 떠오릅니다. 내 배는 왜 눈치 없이 꼬르륵 거려 저 육개장을 개걸스럽게 먹어야하는지. 펑펑 울며 육개장을 목 너머로 넘겼습니다.

뭐든 마음 가는대로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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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각자 표현은 다르더라도 의미와 마음은 통하는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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