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주의의 표준 / 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 중에서
옛 도덕이나 오늘날의 주의란 것이 그 표준이 어디서 났는가?
이익과 손해(利害)에서 났는가? 옳고 그름에서 났는가?
만일 옳고 그름의 표준에서 났다하면,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하고는 그 나무를 베어 불을 때는 인류며,
소를 부리어 농사를 짓고는 그 소를 잡아먹는 인류며,
박 연암(朴燕巖)의〈호질(虎叱)〉문에 말한 것같이 벌과 황충이의 양식을 빼앗는 인류니,
인류보다 더 죄악 많은 동물이 없은즉,
먼저 총으로 폭탄으로 대포로 세계를 습격하여 인류의 종자를 멸절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인류에겐 이해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해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廣狹)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스승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기의 이(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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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나 사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 주관이 아닌 진영을 기준으로 자기를 맞추는 사람들이 가끔 있더군요.
'가만있자, 내가 보수였지? 그럼 나는 여기서 반대해야 되는거지? 할 수 없지. 난 보수니까.'
물론 보수층에만 그런 경우가 있는건 아닙니다.
'이건 어떻게 판단해야되지? 나는 진보니까... 아,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지. 그럼 나도 그러면 되겠지.'
이런 식으로요.
이야기하다보면, 사안에 따라 진보적/보수적인 입장은 넘나들 수도 있는건데...
내용엔 서로 공감해놓고, 결론은 결국 진영을 따라가는 사람도 꽤 있고요.
최근 우연히 저 글을 읽었는데,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좀 더 살펴보니, 신채호 선생은 각종 사상이나 이론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더군요.
교과서 등에서 얼핏 읽은 대쪽같은 이미지만 알던 저에겐 좀 색달랐습니다.
물론 미국한테 "우리 차라리 미국 식민지 해주세요 뿌우★"
이랬던 이승만에게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라도 팔았지, 넌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는구나!"
하면서 멱살을 잡았다든가, 싸다구를 날렸다든가... 하지만요..;;
뭐 정치는 곧잘 정의냐 절대악이냐 하는 식으로 흘러가곤 합니다만,
적어도 그게 자기 주관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걸 다시 느낍니다.
사안마다 편을 가르려는 사람들이 보고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