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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아름다운 구속] 아름다운 구속 그 첫번째. (0) 2013/04/25 PM 10:51
아름다운 구속.

“선배 나랑 사귀지 그래요!”

대학시절. 그 때 그 인간의 한마디는 평생 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 한마디가 나의 삶을 완전히 뒤바꿨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가끔씩, 그 때 그 일만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모든 사건의 시작은 개강과 동시에 OT 준비를 하게 될 때였다. 나는 그 때 다른 남학생들과 함께 OT에 쓸 술이나 식재료 등을 들어 나르고 있었다. 일단 가장 무거운 맥주 박스부터 들고 버스 앞에 내려놓는 일을 했다.

맥주 박스를 두어 번 정도 내려놓을 즈음. 나는 말도 안 되는 광경과 마주쳤다. 맥주 네 박스가 계단을 내려오나 싶더니, 버스 앞에서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지간히 힘 센 인간이네. 나도 한 번에 두 박스씩 옮기는 게 전부인데.”

정확히는 씨름선수 같은 여자가 맥주 박스를 앞으로 들고 계단을 내려온 것이다. 어지간히 체력 좋은 남자라도 두 박스 이상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꽤 힘든데 말이다. 나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이내 알 바 아닌지라 금방 신경을 껐다.

나는 온갖 식재료가 담긴 골판지 상자를 내려놓은 뒤, 바로 내려가서 다른 물건을 들고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그 옆에서 맥주 박스를 내려놓은 누군가가 내 옷깃을 붙잡고 확 잡아당겼다. 그가 내 뒷덜미를 너무 세게 잡아당긴 탓에 옷깃이 내 목을 확 졸랐고, 나는 목 비틀린 닭처럼 늘어진 채 간단히 끌려왔다.

키 186cm에 체중 95kg. 누가 잡아끈다고 쉽게 끌려올 몸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날 잡아 당기자, 꼭두각시 인형 마냥 가볍게 뒤로 끌려간 것은 물론. 균형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대체 누가 날 잡아당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때 내 인생을 바꾼 그 인간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 인간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위압감’이라는 말이 가장 적당했다. 게다가 그 때 마침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그 인간을 올려다보고 있어, 마치 말에 올라탄 권왕을 올려보는 모히칸1 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내 가슴팍 아래쯤에 닿을락 말락한 키. 그런 주제에 머리는 수박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컸다. 이목구비는 우레탄 같은 살에 다 파묻혀, 어디에 뭐가 박혔는지 구분하기 힘들 지경이었고, 그마저도 한 데 몰려 있어 마치 참깨를 듬성듬성 뿌려놓은 편의점 햄버거 빵 같았다.
그리고 목은 통나무가 떠오를 정도로 굵고 짧았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팔뚝은 옷이 찢어질 정도로 굵었으며, 몸은 풍선처럼 크게 부풀어 있었다.

특히 배 부분은 탱크의 앞부분이 떠오를 정도로 두툼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또 다리는 코끼리 다리를 붙인 것처럼 굵고 짧았다. 나보다 더 어깨가 떡 벌어져 있는 것은 물론, 두 팔은 킹콩의 목이라도 비틀 것처럼 우람했다.

어디를 봐도 코끼리나 하마. 혹은 돼지로 보일 만큼 굵직하고 땅딸했다. 그 인간은 내게 솥뚜껑만한 손을 내밀면서, 얼굴을 붉힌 채 한마디 했다.

“미안 선배. 살살 잡아당긴다는 게 그만…. 어디 다친 데 없고?”

그 인간은 생긴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유치원 선생이라도 된 것 같은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그대로 바퀴벌레 마냥 기어서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바퀴벌레처럼 밟힐 것 같았다.

나는 일단 그 인간의 손을 잡지 않고 일어났다. 그러자 그 인간은 아주 잠깐이지만, 바퀴벌레라도 씹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자기 나름 은근한 말투로 내게 한마디 던졌다.

“선배. 보자마자 이런 말 하면 너무 갑작스럽겠지만 나랑 사귀자?”

그 인간은 마치 펀치머신처럼 크고 둥그런 얼굴을 내 앞에 바짝 들이밀면서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것도 이번에 처음 보는데도 말이다. 물론 제 딴에는 애교스럽게 보이려 한 모양이지만, 지금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이를 악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입을 열었다.

“너 나 아냐? 생뚱맞은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해 알았어!”

나는 그 한마디를 한 다음 마치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나는 혹시 지나치게 박력이 넘쳤던 그 후배인가 싶어, 곧바로 손을 쳐내며 가래 끓는 것 같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이 새끼가 건드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이번에는 왠 코카스파니엘 닮은 사람이 헐떡거리듯 웃으며 서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그의 이름을 ‘촐싹이’로 지었다.

“야. 어디서 선배한테 이 새끼니 뭐니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이야 이거 아주 위험한 놈이네.”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인 줄 알고.”
내 사과가 끝나기 무섭게 ‘촐싹이’ 선배는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들겨대며 질문을 던졌다.

너. 방금 봤는데 ‘킹콩’한테 찍혔냐? 찍힌 거 맞지?”

“예?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킹콩이라니.”

나는 그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되물었다. 그러자 ‘촐싹이’는 숨을 잔뜩 들이마셔 몸을 풍선처럼 부풀린 다음. 다시 숨을 내쉬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방금 너한테 급 고백한 괴물 말이야.”

“아….”

나는 다시 한 번 그 기억을 떠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촐싹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내 그럴 줄 알았다.’ 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댔다.

“역시나 너도 당했네. 작년에도 우리 과 남학생들 거의 다 당했거든. 물론 난 임자가 있어서 안 당했지롱. 아마 네가 임자가 없어 보여서 너부터 건드린 모양이네.”

그의 자랑과 도발 섞인 한마디에 나는 입을 꽉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씨발 저런 것도 여자 친구가 있는데 난 대체 뭘 한 거지.’

“야 어디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니? 어쨌건 생각을 좀 바꿔먹고 잘 받아들여 봐.”

‘촐싹이’는 화를 내는 척 하며 내 팔을 꼬집더니, 이내 어깨에 손을 얹은 뒤 씩 웃으며 요상한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나는 그를 붙잡으며 다시 한 번 물어봤다.

“저기 그게 무슨 소리죠?”

“곧 알게 될 거야. 열심히 살펴보면 의외로 장점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방금 전처럼 너무 매몰차게 굴지 마.”

그 한마디를 남기고 ‘촐싹이’는 OT때 쓸 식료품을 가지러 과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내가 그 선배의 말을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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