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3 시간 이상 숨 막히는 여정을 거치고,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들 버스에서 내리고 나와 ‘킹콩’이 내릴 즈음. 킹콩은 내게 손을 내밀면서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선배 몸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내가 부축해줄까?”
나는 순간 ‘킹콩’의 모습이 옛날 동화책에서 본 놀부처럼 보였다. 다만 내가 제비라면 저 놀부의 머리통을 박처럼 깨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허리가 욱신거리고 온 몸 마디마디가 쑤시는 와중에도,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을 찌그러트리며 한마디 던졌다.
“내가 알아서 간다. 그러니까 내 앞 막지나 말고 빨리 나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겁을 먹고 움츠려들거나 놀라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하겠지만, ‘킹콩’은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넘기며 내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물론 그것도 애교라고 할 수 있다면 부모 욕을 하는 것도 애교라고 해 줄 수 있겠다만.
“너무한다. C선배. 이렇게 예쁜 후배가 부축해주겠다는데 매몰차게 거절해?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여자 못 사귄다고”
그러자 ‘킹콩’은 입술을 비죽 내밀면서도 천천히 일어났다. 나는 일어나기 전. 음료수 캔을 킹콩의 주둥이에 처박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내 처지는 나 몰라라 한 채 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를 치면 왠지 나만 손해 볼 것 같아.’
나는 머리 위에서 터지기 직전인 활화산을 다시 한 번 꾹꾹 눌러 담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나치게 좁은 곳에 장시간 앉아 있던 탓인지,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면서 다시 주저앉았다.
“그것 보라고. 선배 몸 별로 안 좋아 보이니까 내가 부축해줄게.”
‘킹콩’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팔을 뻗었다. 나는 에일리언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에일리언의 입에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촉수가 튀어나오는 부분 말이다.
‘안 돼! 이대로라면 죽는다! 잡아먹힌다고!’
결국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좀 세게 나가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 때문에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찌그러진 캔을 바닥에 세게 내던진 뒤, 고개를 살짝 낮춘 채 ‘킹콩’을 꼬나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아 됐다고 몇 번이나 말해! 이게 계속 조용히 넘어가 주니까 진짜!”
그러자 오히려 ‘킹콩 쪽이 코웃음을 한 번 친 다음. 입 꼬리를 쭉 찢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의자 등받이 밑으로 숨었다. 그 다음 내 멱살이라도 쥘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바위 굴리는 것 같은 소리로 내 위협을 맞받아쳤다.
“선배. 나 같은 여자 어디 있다고 이렇게 차갑게 나와? 자꾸 내 마음 무시하고 이런 식으로 튕기면 1년 내내 시달리다가 자살하게 만들어준다?”
그 모습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다가 의자 등받이에 부딪쳤다. 순간 내 눈에서 불이 번득이는가 싶더니, 현기증과 두통이 동시에 내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뭔가 묵직한 게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 녹지도 않은 얼음이 들어있는 생수병이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게 어디서 날아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그 때 소설 과목 교수님의 카랑카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 누가 여자한테 그따위로 행동하랬어? 니가 무슨 깡패냐. 여긴 깡패 같은 놈 필요 없으니까 당장 나가!”
덕분에 다른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나와 ‘킹콩’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자, 하나같이 눈 끝이 가늘고 예리해졌다. 방금 전 ‘킹콩’의 행동들을 다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그들을 죽 훑어보며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있을 때. 버스가 출발하기 전, 날 죽을 위기에서 구해줬던 이쑤시개 선배가 내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으로 어깨를 살짝 밀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야. 너 OT 첫날부터 분위기 깨면 어쩌자고 그래? 쌓인 게 많은 건 알겠는데 여기 너랑 K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중에 너희 둘만 있을 때 조용히 풀어. 다른 사람들까지 휩쓸리게 하지 말고.”
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죽 훑어봤다. ‘킹콩’은 지금이 기회다 싶어, 다시 한 번 내 어깨를 붙잡고. 내 겨드랑이에 전차포 같은 팔을 쑤셔 넣어, 억지로 팔짱을 꼈다. 그 때 내 심정은 상어한테 팔 하나를 통째로 내 주는 것. 혹은 똥통에 팔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젓는 기분이었다.
“선배. 얘기 들었죠.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말고. 내가 부축해 줄 테니까 나랑 같이 가자.”
역시나 제 딴에는 간드러지고 애교 섞인 목소리였겠지만. 내 귀에는 맹수가 고기를 뜯으며 내는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씨발 맘대로 해.”
그러자 ‘킹콩’은 내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민 채, 씩 웃으면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가뜩이나 장시간 버스를 타서 속이 느글거리고 있는데 똥을 밟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머. 선배. 잘 생각했어. 선배 인생에 나 같은 여자애랑 같이 딱 붙어 다닐 일이 몇 번이나 있겠어. 선배 오늘 운이 아주 좋네.”
‘킹콩’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말을 내뱉어 내 속을 긁었다. 그 다음 내 팔이 떨어져라 힘껏 잡아끌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게 나와 ‘킹콩’의 첫 억지 데이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