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선배 무슨 일로 오셨어요? 드디어 저랑 사귀려고 마음먹으신 거예요?”
막 문을 열고 나온 그 인간의 모습은 머리가 막 풀어헤쳐지고, 옷도 구깃구깃한데다가 여기저기 풀려 있어 녹색 페인트만 끼얹으면 킹콩이 헐크로 변신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킹콩’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척을 하며 뒤돌아서 머리나 옷차림을 다시 단정하게 다듬은 뒤 돌아서서 한마디 했다.
“어머 선배. 어딜 쳐다보는 거예요.”
‘킹콩’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오히려 상의를 더 풀어 내렸다. 내 눈을 뽑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킹콩은 마치 영등포 역 앞의 빨간 방 아가씨 마냥 내 팔을 잡아끌었다.
“선배. 여기로 오세요. 여기 와서 저랑 왕게임 해요.”
나는 문 앞에 소화기가 하나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소화기를 집어 들어 그 괴물의 머리통을 힘껏 내리치고 싶은 충동이 가득 차, 터질 정도로 머리가 아파왔다. OT하루 만에 군대에 있을 때 느꼈던 살인충동을 뛰어 넘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른 침과 함께 치밀어 올라오는 화를 삼킨 뒤, 조용히 한마디 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가 방금 전에 크게 웃은 거야?”
그 괴물은 평소대로라면 ‘에이 선배 설마 제가 그러겠어요.’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순간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지만, 나까지 잡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인간의 대답이 끝난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난 그냥 못 찾았다고 말할 생각으로 재빨리 등을 돌렸다.
“C선배 어디 가는 거에요? 저 찾은 거 아니에요?”
나는 ‘킹콩’이 손잡고 가자고 할까봐 재빨리 교수님 방까지 달려갔다. 마치 13일의 금요일에서 제이슨을 피해 달아나는 희생양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괴물은 덩치에 맞지 않는 속도로 내 뒤를 쫓아 결국 둘 다 거의 동시에 교수님 방에 도착했다.
“교수님. 저 찾으셨어요?”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킹콩’은 곧바로 문을 걷어차듯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선봉장이라도 된 기세로 크게 외쳤다. 이에 교수님은 살짝 귀를 막으면서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 우렁찬 목소리를 보니까 데리고 왔구나. ‘그 놈 어디 있냐?’ 한 번 얼굴이나 보자.”
나는 재빨리 달아나려 했지만, 킹콩이 어느새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킹콩’이 교수님 앞으로 나선 순간. 그 인간보다 한참 키가 큰 교수님이,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킹콩’은 호쾌한 모습으로 교수님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교수님은 그 모습을 보며, 순간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그래? 너, 너였냐? 아니 나는 그냥 웃음소리가 크게 들려서 말이야.”
그 때 교수님의 모습은 마치 절벽을 등진 상태에서 곰이라도 만난 것 같았다. 교수님은 천천히 입을 열어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너 반대편 끝 방에 있던 거 아니었냐? 그리고 방금 네가 웃은 거 맞지?”
‘킹콩’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아주 씩씩하게 대답했다. 방금 전 나와 단 둘이 있을 때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예 교수님. 그런데 제가 그렇게 크게 웃었나요?”
‘킹콩’의 웃음소리가 한 층 전체에 싹 다 울린 것이다. 그것도 꽤 넓은 규모의 호텔에서 말이다. 그 웃음소리에 비하면 임꺽정이 호통 치는 소리가 모기 소리로 들릴 정도? 그럼에도 그 인간의 입에서 ‘제가 그렇게 크게 웃었나요’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교수님은 그 인간을 보자마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한 투로 한마디 던졌다.
“아. 그, 그래. 참 호탕해서 마음에 든다. 이리 와서 앉아라. C도 뭐 하고 있어 어서 들어와서 한 잔 더 해야지.”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살아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나는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저기 교수님. 저는 많이 취한 것 같아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너무나도 환한 미소를 보여줬다.
“에이 이 녀석아. 아직 멀쩡해 보이는데 뭔 소리야? 너 전에도 술은 아주 잘 마셨잖아. 할 얘기가 많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
평소였다면 ‘예 교수님’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겠지만, 이번만큼은 교수님의 권유가 다섯 살짜리 아이의 사탕을 뺏어먹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결국 나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다시 들어가고 한두 잔씩 술이 돌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다른 사람들은 술이 꿀물처럼 술술 넘어가겠지만, 나는 술을 한 잔 마실 때마다 마치 구정물을 목으로 넘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도중 조교가 눈치 없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야. 너. 이제 나이도 슬슬 찼는데 학교에서 연애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냐? 혹시 과에서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어?”
나는 ‘없다’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워, 적당히 이름을 알고 있는 여학생을 댔다. 그리고 그 때 여장부의 두툼한 입에서, 디젤 엔진이 들썩이는 것처럼 걸걸한 목소리의 한마디가 튀어 나왔다.
“아 선배 그 여자한테 고백하려고요? 선배만 힘들어질 텐데 관둬요. 그 여자 사이코라니까요. 그런 애한테 고백하면 선배만 힘들어져요. 그냥 저하고 사귀면 아주 좋을 텐데.”
순간 나는 맥주병을 집어 들고 그 인간의 머리통을 내리칠 뻔 했다. 그나마 조교나 교수님이 내 기분을 읽어줬으면 싶었지만, 조교나 교수님마저 물 밖으로 나오려는 내 머리통을 몽둥이로 후려치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 뭐. 니 좋다는 사람 보기 드문데 참 잘 되었다. 이 기회에 연애 좀 해서 사람 되어야지. 안 그래?”
“야 그래도 둘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생각 잘 해봐.”
그 한마디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내 주변에 앉아 있는 교수님이나 조교. 그리고 다른 선후배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살짝 인상을 구기며 미지근해진 맥주를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마른 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어 삼킨 뒤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러자 그 인간이 나한테 찰싹 달라붙으면서 제 딴에는 귀엽게 보이려는 투로 한마디 했다.
“선배 그러다가 건강 망쳐요. 제가 따라줄 테니까 천천히 마세요.”
그 때 나는 잇몸에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이를 꽉 다물었다. 그리고 그 인간을 노려보며 맥주병을 힐끗 쳐다봤다. 이걸로 그 인간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걸 상상하는 것도 세 번째. 나는 그 인간에게서 병을 뺏은 뒤, 스스로 잔에 맥주를 따라 마셨다. 그 덕분에 취기가 머리끝까지 올라갔지만, 교수님의 눈치를 보느라 한 시간은 더 그 인간과 함께 한 채 술만 줄창 목구멍으로 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