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침. 어제 일 때문인지 교문 앞에서만 해도 하품 때문에 입을 닫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걸어 다니면서 꾸벅꾸벅 졸던 중.
“C선배. 어제는 고마웠어요. 항상 옆에 붙어 있고 싶은데 괜찮죠?”
“뭐, 뭐야 이게? 설마 야동 공유 사이트에서 보낸 스팸인가?”
여자랑 아무 인연 없었던 25년. 당장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스팸메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팸메일이라면 으레 따라붙을 야릇한 느낌의 홈페이지 주소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문득 어제 후배 한 명을 도와줬던 일이 떠올랐다.
“으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나는 순간. 그 후배가 문자를 보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게 이제 갓 복학하고 잠깐씩 자기소개만 한 정도였기 때문에, 누구인지도 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제만 해도 그 후배한테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적도 없었다.
“아마 잘못 온 문자겠지. 나한테 이런 문자를 보낼 사람이 없는데 말이야.”
나는 쓴 맛이 섞인 침을 삼키며 전화기를 닫았다.
“저기 C선배. 뭘 보고 계셨어요?”
그런데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자마자, 그녀가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그녀가 곧바로 허리를 숙여 휴대전화를 주워줬다. 나는 혹시 하는 생각에 곧바로 그녀의 손에 쥐어진 휴대전화를 뺏어가다시피 받아들었다.
“아, 아냐 별 거 없어. 그냥 시간 확인만 한 것뿐이라고. 그런데 웬일로 온 거야?”
“방금 보낸 문자 잘 받으셨나요?”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생글생글 웃었지만, 나는 순간 넋이 빠져나간 것처럼 얼굴의 긴장이 확 풀어졌다. 설마가 사람 잡는 건 여러 번 봐 왔지만, 그 설마가 이번에는 내 덜미를 잡아 챌 줄은 몰랐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어떤 대답을 할지 궁리해봤다. 솔직히 물어보고 따질 것인지, 아니면 적당히 넘어갈지. 그 생각을 하며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힌 채 약간 흥분한 것처럼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니 휴대전화 번호 정도는 조교나 교수님한테 물어볼 수도 있는 일이었고, 어제 일로 문자를 보낸 정도라면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단 문자 내용은 약간 오버했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는 데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폐가 쪼그라들 정도로 한숨을 내 쉰 다음. 후자를 선택하고 적당히 둘러댔다.
“저기…. 그래 잘 받았어. 그런데 너 어제 넘어질 때 다친 데는 없었어?”
물론 적당히 둘러대기 위한 질문이지만, 왠지 그녀의 몸을 보면 그런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작은 몸집에서 나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를 냈다.
“‘너’ 라거나 ‘저기’ 라는 식으로 부르지 말아주세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제 이름은 안 다래에요! 저도 선배를 이름으로 불렀잖아요! 저도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선배!”
나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그녀가 나한테 바짝 달라붙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압도’당했다. 나는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다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그래. 다래야. 그런데 무슨 일로 날 불렀어.”
그리고 그녀 아니 다래는 마치 증기라도 뿜어져 나올 것처럼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뒤, 앞뒤 전혀 살피지도 않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순간 멧돼지한테 들이받히면 이런 충격을 받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녀는 마치 프레스기로 폐차를 찌그러트리는 것 같은 힘으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저 선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선배 저랑 사귀어 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꽉 죄여진 채, 숨을 헐떡이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새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싶을 정도로 조용하기까지 했다.
“자, 잠깐 이것부터 놓으라고 나 죽는단 말이야!”
물론 오늘도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이 내 몸에 닿긴 했지만, 아래가 반응할 틈은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토마토 페이스트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다래는 팔에 힘을 살짝 빼긴 했지만, 여전히 나를 꽉 끌어안은 채 내 얼굴을 올려봤다.
나는 먼저 두어 번 심호흡을 했다. 다시 그녀를 쳐다본 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그래 그런 얘기…. 뭐, 뭐라고?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방금 전 내가 바로 그랬다. 와 인연이 닿은 거라고 해 봤자, 개강 때 자기소개하고 어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려던 걸 도와준 게 전부였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어대며 황급히 따져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딱 두 번째 만났잖아? 그런 건 조금씩 시간을 들여서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야 좋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아?”
그러자 다래는 깍지까지 낀 팔을 푼 다음. 내 두 손을 맞잡으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내 항의에 조목조목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저! 선배를 위해서 선배에 대해서 많은 걸 알아냈어요. 주로 좋아하는 음식은 육류 및 면류고 주량은 소주 세 병. 그리고 좋아하는 소설 장르는 SF액션 그리고 취미는 모형 조립. 가족 구성은 네 명에 부모와 남자 형제 하나. 또 사는 곳은….”
순간 나는 그녀의 입을 막은 뒤,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다시 손을 떼고서 다급한 투로 윽박질렀다.
“그만! 그만! 거기까지! 내 신상정보가 다 새어나가니까 그만해!”
이건 교수님한테 연락처를 알아냈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심부름센터 마냥 내 신상정보를 파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아니 심부름센터는 최소한 저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파내지는 않을 것이다. 심부름센터보다 훨씬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텅 빈 눈으로 한참 동안 다래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간신히 입을 움직여 힘이 쫙 빠진 투로 한마디 흘렸다.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다 캐낸 거야?”
다래는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산낙지 마냥 몸을 비비 틀면서 얼굴을 붉혔다.
“사는 곳하고 전화번호는 과 사무실에 가서 물어봤고, 취미는 인터넷에서 찾아봤어요. 친구한테 검색하는 걸 배워서 휴대폰 번호로 검색했더니, 선배 블로그가 나오던데요. 거기에서 봤어요. 선배 이 정도면 제 마음 알겠죠?”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니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블로그에 휴대전화 번호 등을 공개했던 적이 있었고 거기에 있는 온갖 시시콜콜한 얘기 중에는 취미라거나 가족 이야기 등이 전부 다 들어 있던 것도 기억났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걸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였다.
“그래도 이건 좀….”
기분 나쁘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뭔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다래의 얼굴을 보면서 대놓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 얼굴 앞에서 험한 소리가 나오면 어떻게 될지 ‘무서웠기’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쪽으로도 골치 아파질 것 같으니까 블로그를 손봐야겠어.’
그저 한숨만 내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 때 의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내 쪽으로 쓰러지듯 살포시 몸을 기대왔다. 다래의 체형을 보면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눈가 밑에 기미가 껴 있는 게 눈에 띄는 게 신경 쓰였다.
‘가만. 그런데 그거 검색하는 데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나?’
그러자 그녀는 내 생각이라도 읽은 모양인지, 옷깃을 붙잡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데, 선배를 생각하면서 전부 다 외운다고 밤을 샜거든요. 어때요? 선배 저랑 사귀어 주실 거죠?”
그녀는 눈 밑에 아이섀도처럼 기미가 드리워진 것도 지워질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토실토실하고 기름진 물소 궁둥이를 쳐다보는 사자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제야 ‘이쑤시개’선배가 말했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말이야 쟤한테 너무 잘 해주지도 말고 가까이 붙지 마. 이유는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은 내가 말하는 거 명심해서 들어.’
‘그런데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이쑤시개 선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C선배. 선배. 선배!”
한편으로 다래는 계속 내 이름을 불러대며 작은 손으로 내 옷깃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나는 한참 동안 입을 쩍 벌린 채 넋이 입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다가, 반쯤 빠져 나간 정신을 마른 침과 함께 삼킨 뒤 애써 웃으며 적당히 받아 넘기려 했다.
“아니 그게 말이야. 싫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고. 그냥 단순히 너무 갑작스러울 뿐이야. 조금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내가 원한 건 곰곰이 생각해 볼 약간의 여유였다. 하지만 다래는 갑자기 그 작은 체구에서 나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나를 확 잡아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보고 말았다. 그녀의 화가 난 표정을….
“선배 그럴 줄은 몰랐어요! 제가 뭐가 모자라서 싫다는 거죠 예?”
아예 듣지도 않고 자기 혼자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 때의 모습은 물소 궁둥이를 한 입 베어 문 맹수의 모습이었다. 나는 얼굴 근육에 힘이 빠지는 걸 억지로 버티느라 마치 쓴 약을 삼킨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다래는 그런 내 얼굴을 보며 한층 더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 지르며 씩씩거렸다.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선배!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선배한테 사랑받을 거예요! 기다리세요! C 선배!”
그 한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마치 순정만화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울면서 달려 나갔다. 나는 담배 하나를 빼 물고 불을 붙인 뒤, 한숨이 반섞인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모자란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지나쳐서 문제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