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는 아직 찌뿌둥한 눈을 뜨고 문지방 너머로 눈길을 던져본다. 오늘은 성긴 마당울 밑에 장끼와 까투리 한 쌍이 늘어진 모가지를 서로에게 기대어 놓여 있었다. 숨은 끊어져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서로 몸을 부비고 어딘가 떨어진 조나 쪼러 갈 듯이 싱싱하고 다정하게 놓여 있었다. 청년은 장지를 완전히 열지 않고 잠시 주변을 살펴본다.
누가 그런 일을 하는고 생각하면 짐작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지난번 요물 아이를 구해준 이후로 아침마다 꼬박꼬박 토끼나 메추리 같은 먹거리가 마당에 놓여 있게 되었고 꼭 언젠가는 마당을 급히 빠져나가는, 살랑거리며 사라지는 흰 꼬리자락을 얼핏 본 것 같기도 했다.
인기척이 없다. 아직 해도 다 나지 않은 새벽이다. 사내는 장지를 걷어 얼른 마당으로 나가 선물로 놓인 꿩 한 쌍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바쁜 손으로 털을 뽑고 모가지를 쳐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발라낸다.
선물은 고마웠다. 부쳐먹을 전답 하나 없이도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조선팔도에 그 자신 하나뿐이지 싶었다. 하지만 다른 눈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무 캐서 연명하는 자기네 사정에 매일 고기 냄새를 피운다면 필히 추궁하는 자가 있을 테고 그는 언젠가 요물과의 이야기를 자진하여 털어놓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았고 고마운 그들에게도 이롭지 않았다. 하여 받은 것은 되도록 받은 대로 동이 트기 전에 전부 소진하였다.
동이 트기 전에 사내는 어머니 드릴 죽과 반찬, 자기 먹을 것에 빈약한 양념이나마 베풀어 조리해 아직 주무시는 어머니 발치에 상을 차려두고 나무할 채비를 하여 울을 나섰다.
어머니께선 다시 앓아 누우셨다.
의원의 처방은 효과가 분명 없지 않았다. 무명을 한 필하고도, 최선을 다해 주십사 반 필이나 더 얹어서 지은 탕 한 사발, 약 여섯 첩은 한참 앓으신 어머니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였다. 그러면서 매일 좋은 것을 먹으며 조리를 하니 하루하루 기력을 찾으시고 남의 삯바느질까지 해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었다.
그러나 날이 습하고 더워지면서 차츰 시름시름 하시더니 다시 자리에 눕고 말았다. 청년은 전의 그 의원을 다시 불렀다. 맥을 짚고, 안색을 살피곤, 마당 자리로 불러 환자에게 들리지 않게 하는 말,
“큰 돈을 준비하시게.”
먹을 걱정이 덜해져 재물이 조금 여유로웠던 사내,
“이번에도 같은 것이면 됩니까? 두 배로 더 좋은 것 치를 재물이 있습니다.”
“약 치를 값 말고 상여 맬 사람 줄 삯.”
사내는 상여, 듣고 상여, 상여 하다가 아버지 타신 상여 앞을 앞서는 꽃분장한 늙은 나귀의 쩔룩거리는 걸음걸이와 불길한 워낭소리, 사람들의 늘어지는 곡소리를 떠올리고서야 의원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비로소 아! 탄성 내며 아찔하였다. 의원에게 매달린다.
“정녕, 방도가 없겠습니까? 삼이면 됩니까? 백삼, 홍삼? 주사는 어떻습니까? 영지, 동충하초, 뭐든지…….”
사내는 들어본 적 있는 약재 이름을 뭔지도 모르면서 주워섬기며 지껄였다. 늙은 의원은 매달리는 사내를 힘주어 때어내 세워두고 고개를 젓지도 않고 단호히 말했다.
“아닐세. 자네 어머님은 앓으시되 앓는 게 아닐세. 때가 오신 게지. 그때도 말하지 않았나. 오히려 이미 천수를 넘기셨네. 지천명(知天命)이실세. 아마 어머님 자신도 거스를 수 없는 하늘의 뜻임을 다 알고 계실 걸세. 자네도 이르지만 알도록 하게.”
아무리 애원하고 사정해도 소용 없었다. 의원은 이제 천명을 따를밖에는 도리가 없다 하여 이젠 불러도 오지 않았다.
여우들이 선물로 주는 것이 있다 하여도 벌이는 따로 해야 했기에 사내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박가네도 자기들 논일 보아야 한다 하여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해 떨어지기 전에 나무 한 지게 캐고 돌아오면 어머니는 그대로 자리에 누워 있으시되 두 끼 차려놓은 상에 수저 든 흔적 있는 걸 보면 식사는 하시는 모양인데 죽도 나날이 그 드시는 양이 자꾸 줄기만 하였다. 좀 더 때가 지나면 언제 가실지 모르니 나가지 않고 계속 옆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은데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계시는 때가 자꾸 늘었다. 사내가 나무하러 가기 전에, 그리고 하고 돌아와서 한 식경씩은 입을 열진 않더라도 사내의 이야기를 들어는 주었는데 이제 사내는 어머니의 숨소리 서근거리시며 주무시는 모습뿐이 볼 수 없었다.
산에 오르는 걸음걸음이 무겁기만 하였다. 상여꾼들 어깨 위의 상여가 어머니 두고 떠나는 자신의 지게보다 무거울 것 같지 않았다.
능선 넘을 무렵 기척이 났다. 사내는 기척 있는 쪽으로 고갤 들었다. 아무도 없다. 뒤에서 누가 톡톡 어깨를 두드린다. 돌아보니 하얀 아이가 컁- 하고 팔을 위로 한껏 뻗었다. 이전에 그가 구해준 꼬리 하나 있는 아이였다. 사내가 놀라는 체를 해주니 뻔히 보이도록 나무 뒤에 있던 꼬리 둘 있는, 검은 머리 아이가 꺄르륵 웃었다. 둘이 웃었다. 사내도 웃어 주었다.
두 아이는 사내를 따름인지 사내가 나무하러 나오는 길에 종종 나와 졸래졸래 쫓아다녔다. 이렇게 먼저 나와 마중을 나오기도 하고 사내가 나무를 패고 있으면 부주의하게 도끼 근처로 불쑥 나와 사내가 주의 주는 때도 있었다. 어머니를 홀로 모시며 혼기 지나도록 중매도 보지 못한 사내에게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그런 아이들이 따르고 어울려 주는 것은 퍽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무를 하다 여유가 있으면 스스로 나서서 놀아주기도 하였고 비록 그 여우들에게 받은 것이지만 장에 팔 수 없어서 과하게 남은 음식을 가져와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 가끔 찾아와 주지 않을 적에는 아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어머니 앓으시기 전까지다. 아이들이 싫어진 것은 결코 아니나, 자기 사정도 모른 채 까불락거리며 주변을 맴도는 그들이 조금은 귀찮기도 하였고 웃어주기 힘듦에도 웃어주는 것 역시 편치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사람 말도 못하는 그들에게, 천진한 그들에게 자신의 무거운 마음을 털어놓는다 하여도 해소될 리 없었고 그들에게 불편을 끼칠 뿐이었다.
오늘은 왜인지 더 활력 있어 보였다. 꼬릴 살랑이며 사내 주위를 빙글빙글 맴도는 것이며 이미 그들의 옷이 흙투성이인 것이며 보아 이미 사내가 산 오르기 전부터 저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었던 것인 듯 하였다. 날씨가 좋았다.
그럴수록 사내는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참 좋겠다. 아무 걱정도 없이 저리 놀 줄도 아는구나. 요물이면 늙어서 죽는 일은 걱정에도 없겠구나.
요물은 몇 해나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났다. 여우가 사람 몸을 하려면 백 년은 묵어야 한다는 소릴 어디서 들었다. 그러면 이 아이들도 어머니보다 오래 산 것일까? 사람이 반 백 년을 겨우 넘기는데 어떻게 짐승이 이토록 장수할 수 있는가?
상수리 있는 곳에 이르러 사내가 상념을 접어두고 지게를 내리며 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까불지 않는다. 저들끼리 붙어서 사내의 안색을, 눈치를 흘긋흘긋 살피었다. 사내는 자신의 근심이 겉으로 드러났구나 싶어 아차 하며 입꼬리를 올려보았으나 그건 볼을 찡그리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체를 하려 고쳐서 여러 번 하였으나 아이들은 도리어 더 꿰뚫어 뿐이더라. 사내는 지게를 두고 전에 벤 나무 밑동에 털썩 앉아서 다시 상념에 젖어 들었다. 아이들도 그의 옆에 가만히 앉아 주었다. 사내는 까딱까딱 쫑긋쫑긋하는 그들의 희고 검은 귀를 보았다. 누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까? 인술을 행한다는 의원은 손을 놓았다. 박가네는 저들 일이 바쁘고 그건 다른 이들도 다를 바 없었다. 사람에겐 사람의 일이 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말라서 갈라지는 논바닥 보듯 바라보는 것 말고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것들이라면 어떤가? 요물이고, 본연은 축생이지만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살아온 그들이라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할 수 없는 걸 하는 건 하늘을 거스르는 걸까? 사내에게는 그날 여우를 승냥이에게서 구해준 일부터 천명인 것 같았다. 모든 것은 결국 다 하늘의 뜻 아니던가? 요물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람의 일이고 하늘에 거스르는 일이 아니리라.
“여우들아,” 사내가 아이들을 불렀다. “내, 너희 누이들을 만나 긴히 청할 게 있으니 혹 길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아이들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말은 안 해도 서로 통하고 전하는 게 있는지 이내 다시 청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아이들이 그를 이끄는데 이제 장난기라고는 터럭 하나만큼도 남아있지 않더라.
두 아이를 쫓아가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게 문득 저번에 보았던 그 초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사람 말 아닌 짐승소리로 기척을 내고 사내가 ‘실례하오’ 인사하니 마당에서 기운 좋게 장작을 패던 꼬리 여섯 있는 여인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아아, 또 오셨구려.” 그녀는 누구를 콕 짚어 부르는 듯이 말했다. “언니- 그 총각이외다.”
그리고 도끼머리를 쿵 땅에 두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날이 덥소. 이리 마루에 좀 앉아 계시지 그러오?”
하고 자리를 권하고는 같이 온 두 아이에게 개울에 둔 수박을 가져오도록 시켰다. 사내가 지고 온 것을 놓고 응달 진 마루 한 켠에 걸터앉자 일곱 꼬리 있는 여인이 저번과 같이 승글능글 웃음 띤 채 그를 맞이하러 방에서 나왔다.
“또 오셨소? 이곳은 사람이 함부로 나들 곳이 아닌데 말이오.”
여인은 그러며 장난스러운 위협을 하며 흐흐 웃었으나 사내가 따라 웃는 것이 썩 한 점 흐린 곳 없이 맑게 웃는 것이 아니요, 그 자신도 이미 어렴풋이 아는 바가 있는지라 몸을 바로이 하고 말을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오? 보아하니 그냥 놀러 온 것 같진 않소만.”
사내가 지체 없이 답했다.
“부탁이 하나 있소.”
어디서인지 꼬리 다섯 달린 여인이 사발에 냉수를 떠다 버들잎 두 장 띄워 가져왔다. 그가 온 것을 보고 일곱 꼬리 여인은 슬쩍 물러났다. 그가 사발을 그에게 건네고 바람에 휘는 버들잎 같은, 웃는 듯 웃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말해보시오, 성심껏 도와드리리다.”
하는데 그의 태도가 무척 마음 놓이고 꼭 정말 의지하여도 될듯하여 사내는 주저 없이 생각한 바를 여쭈었다.
“어머니께서 다시 앓게 되셨소. 이제는 의원도 단념하라 하오. 어머닐 위해 손 써줄 사람이 없소. 그렇지만 당신들이라면, 어떻게, 방법이 없겠소?”
“자네 자당에 대해서는 얼추 들은 바가 있네마는…….”
물러났던 일곱 꼬리 여인이 냉수를 가져다 놓고 다소곳이 앉은 여인의 다섯 꼬리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꼬리로 입가를 살짝 가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늘이 정한 명(命)앞엔 사람이나 우리나 한낱 미물일진대 저항할 길이 어디 있겠소. 우리 명이 길다고는 하나 수명은 본디 나눌 수 없는 것인지라 때가 가까이 와 드는 병은 도와줄 수가 없구려.”
사내는 크게 상심치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의원에게는 이것보다 더 매달린 적 있는 바 그들에게 역시 못 할 것은 없었다.
“허면…. 적어도 기력이라도 차리시게 할 수는 없겠소?”
때는 거스를 수 없더라도 마지막까지의 생활까지 구제받을 수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꼬리 일곱 있는 여인은 눈을 슬쩍 감았다 뜨며 조심이 답했다.
“사람의 몸에 대해선 우리보다 사람 의원이 아는 바가 훨씬 더 많을 것이오. 귀한 약재가 필요한 것이라면 구해줄 순 있겠지만,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것이라면 우리도 도리가 없소…….”
말은 유했으나 의원이 하는 말과 같이 뼈는 단단했다. 안 된다. 고개를 숙인다.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버들잎 뜬 물에 파문을 냈다.
“미안하게 됐소. 아무 도움이 못 되는구려.”
사내가 일어났다.
“아니오. 이야기라도 들어주어 감사했소.”
사내가 떠날 채비를 하니 그가 말한다.
“다섯째야, 막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네가 이분을 마중해드리겠느냐?”
사내 가까운 곳에 사발을 두고 수굿이 앉아 있던 여인이 그리 하겠노라 하며 망설임 없이 일어나 사내가 채비하는 것을 기다려 곧장 슬쩍 옆에 나란히 섰다. 사내가 채비를 끝내자 꼬리 다섯 있는 여인은 나긋한 태도로 길을 안내해 나갔다.
둘은 말 없이 초가를 떠나 사내가 늘 나무를 캐던 곳으로 갔다. 그곳에 이르자 사내는 다시 지게를 내려 놓으며 자신은 이제 나무를 하다 가야겠으니 당신은 그만 조심이 돌아가보라 자신을 따라온 그에게 말했다. 그때에 그는 선뜻 돌아가지 아니하다 조금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명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기력만 차리는 것이라면 아주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내는 화들짝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것이 대체 무엇이오? 무엇이든 하겠소. 알려만 주시오.”
그러니 여인은 바로 답하지는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하곤 나무들 사이, 사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갔다. 사내가 까닭도 모르는 채 기다리고 있자니 그가 곧 품에 무엇인가를 감싸 들고 그의 앞에 다시 섰다. 그가
“이것입니다.”
하며 사내에게 주의 있는 몸씨로 내보인 것은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투명한 구슬이었다. 그것에는 티가 없었고 모난 곳 없이 완벽했다.
“이것은…?”
“저의 일부입니다.”
“일부라 함은…?”
“저희의 생명의 정수에서 한 부분을 떼어낸 것입니다.”
청년은 잠시 어떻게 좋을지 몰랐다. 이런 것을 넙죽 받아도 좋은 것인가? 아무리 자신이 그들 중 하나를 구해준 적이 있다 해도 이런 것까지 받는 것은 과하지 않은가? 이런 것을 염려하는 사내의 얼굴을, 도리어 부분밖에 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라 여긴 듯 여인은 당황한 기색으로 부연했다.
“그것이…. 저희 언니 한 분이 예전에 이런 식으로 나누어 주었다 사람에게 속아 되돌려 받지 못한 일이 있어 함부로 해드릴 수 없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마 저희들 중 이렇게까지 해드릴 수 있는 건 저뿐일 테고 언니께서 저를 당신 마중 보내신 것은 아마 제게 그 판단을 맡기려 함이셨을 테지요.”
사내는 그의 마음 씀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크고 그의 마음에서는 도리어 과하기보다 모자라다는 것을 알고 입을 함부로 열 수 없었다. 얼마간 묵묵히 있다 말했다.
“이런 것을 덜컥 주어도 괜찮은 것이오? 아무 문제 없는 것이오?”
“직접 겪어본 적이 없어 이 영향은 스스로 잘은 모르나 일전 언니께서는 긴 세월 멀리 돌아다니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언니는 정수의 대부분을 주었던 반면 저는 극히 일부를 드리는 것이니 큰 염려는 마시길 바랍니다.”
사내는 그렇게 듣고서야 그의 모아 내민 손에서 구슬을 취했다. 사내가 그것을 받아주자 여인도 그제야 긴장했던 기색을 풀고 입가에 다시 버들잎 같은 미소를, 하지만 아까보다 더 휘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잘게 바수어 탕을 끓이듯 달이면 될 것입니다. 훗날 어머님께서 별세하시면 그때 되돌려받겠습니다.”
사내는 머리를 몇 번이고 깊이 조아리며
“고맙소, 고맙소, 정말 고맙소…….”
하고 되풀이 하였다.
“아닙니다. 저희 막내를 구해주신 분이거니와…. 무엇인들 못 해드리겠습니까.” 하며 여인은 흰 손가락으로 동리 쪽을 가리킨다. “이제 바삐 가십시오. 어머님께 어서 전해드리세요.”
사내는 더욱 감사하고 싶었지만 그의 말대로 어머니에게 바삐 전해드리는 것이 먼저였기에 그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반 뛰다시피, 그러면서 든 것을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의 분위기는 다시 평소와 같았고 문득 그 여인이 다시 생각나 돌아보니 여인은 물론 그가 지나왔던 길도 더 보이지 않았다.
사내가 돌아와 여인이 알려준 대로 구슬을 바스러뜨려 달인 것을 어머니께 올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가 차린 상을 남김 없이 비울 정도로 기력을 회복하였다.
그날 해가 떨어질 무렵 사내가 그 여인을 떠올리며 마당으로 나와보니 마당에는 수박 한 통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