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2003년 의경근무중이었고
창원에 근무중 부안으로 중대전체가 지원 나갔습니다.
방폐장 반대 시위로 알고있습니다.
그 곳은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마치 택시운전사의 광주 모습을 보는것과 같은
도로 곳곳 불탄 흔적들, 문닫은 가게들, 곳곳에 떨어진 가스통들
생지옥과 같은 경험에 아직도 가끔 그곳의 악몽을 꿉니다.
나무위키에서는 [준전시상황]이라고 표현하네요.
그 당시도 언론통제되어 매일 뉴스보시던 부모님도 모르셨던
마치 80년의 광주를 재연한것 같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의경이었어서 의경입장으로 얘기하자면.
시위대들이 대나무를 비스듬히 짤라 죽창을 만듭니다.
그걸로 찌르면 그나마 막기나 좋겠는데.
땅바닥에 수추례 내려처서 갈기갈기 여러갈래의 창을 만듭니다.
그 상태로 찌르면 하이바 투시망도 뚦어서 한달 후임은 눈에 찔리고 한 후임은 허벅지 살이 찟어졌습니다.
지금와서 검색해봐도 자료가 많이 없네요.
이유와 어찌되었던 슬픈 사건일거고
부안군청앞에서 시위대와 대치중
불붙은 LP통을 우리쪽으로 굴리던 그 시위대의 모습을 아직도 뇌리에 남습니다.
이하 나무위키 펌
2003년 7월 저준위 방사능 폐기장 유치문제를 놓고 벌어진 대규모 유혈사태. 제2의 안면도, 굴업도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김종규 당시 부안군수가 지역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주민과 협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방폐장 유치를 결정했는데, 이에 반발한 주민들이 거센 시위를 벌였다. 이를 막기 위해 인구 6만 명의 부안군에 무려 1만 명의 경찰이 배치되는 준전시상태가 벌어졌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전경들이 이동할 때 최소 중대 단위로 뭉쳐다녀야 할 정도였다. 시위지역 부근 골목에 복병(...)이 깔려 있어 이동하는 전경들 측면이나 후미를 기습하는 일도 잦았다.
이 당시 전의경 근무자들은 이 지역을 생각 하면 치를 떤다. 시위대의 폭력이 상식 따윈 버려버린 수준이었기 때문.
엄청난 반발에 겁을 집어먹은 부안군수는 산속의 절로 도피를 하고 경찰병력을 배치해서 주민을 막으려 했는데, 분노한 주민 수백명이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들어가 군수를 집단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민 45명이 구속되고 121명이 불구속 기소됐으며, 경찰과 주민 5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렇게 난리를 치면서 부안군의 방폐장 유치는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런데 그후 경주시가 방폐장을 유치하면서 그 대가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고, 이에 부안사태가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되었다. 결국 니가 잘못했네, 네가 잘못했네 하는 식으로 의견이 갈리면서 지역 분위기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이 초유의 부안 사태는 행정학계에서 아주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사전에 충분한 행정PR 없이 일방적인 행정을 추진하면 어떤 부작용이 초래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만약 부안군수가 사전에 충분히 PR을 했더라면 주민을 설득할 기회도 있었을 것이고, 설령 설득하는데 실패했다고 해도 이후 경주시의 유치 성공을 통해서 교훈을 얻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주민을 무시한 독단적 결정과 여러 가지 오해가 중첩되면서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게 되었다. 부안 사태에 대해 물어보면 주민들은 아직도 손사래를 친다고 한다...
▲ 부안읍내 '아담 사거리'에서 경찰과 대치중인 군민들이 가스통 3~4개를 폭파해 경찰을 위협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