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구로사와 아키라는 정말이지 형편없는 영화만 만들었다. 재미도 없지만, 그렇게 대단한 내용을 보여주진 못했다. 오로지 꿈 만이 엄청나게 화려한 영상을 보여줬지만 어쨌든 그 영화도 엉터리였다. 그는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 낸 대단한 인물로 여겨지지만 란 이후로 만들어 낸 영화를 보고 감명 받아 그를 거장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런 작품들만 만들었으면 지금처럼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러운, 사실 의심할 여지도 없을 정도로 수준 이하였었다.
구로사와는 꾸준히 성장을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낸 사람이였다. 그의 영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스타일을 변화시켜 갔다. 그 것은 그가 꾸준히 배우고 익혀가면서 그의 영화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최고로 꼽는 영화 100편을 시대 순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이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시대별로 그가 영화를 만들 때 받았던 영향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가 구로사와가 좋아했던 영화들이라고 한다.
1919 – 흩어진 꽃잎 Broken Blossoms, USA, D.W. Griffith
1919 –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 The Cabinet of Dr. Caligari, Ger, R. Wiene
1922 – 도박사 마부제 박사 Dr. Mabuse: The Gambler, Ger, Fritz Lang
1925 – 황금광시대 The Gold Rush, USA, C. Chaplin
1928 –어셔가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France, Jean Epstein
1928 – 안달루시아의 개 An Andalusian Dog, France, Luis Buñuel
1930 – 모로코 Morocco, USA, Joseph Von Sternberg
1931 – 콩그레스 댄스 Der Kongress tanzt, Ger, Eric Charell
1931 – 서푼짜리 오페라 The Threepenny Opera, Ger, Georg W. Pabst
1933 – 신성한 부부 Lover Divine, Ger-Au, Willi Forst
1934 – 씬맨 The Thin Man, USA, W.S. II Van Dyke
1934 – Our Neighbor, Japan, Yasujiro Shimazu
1935 – Tange Sazen, Japan, Sadao Yamanaka
1936 – Capricious Young Man, Japan, Mansaku Itami
1937 – 위대한 환상 The Grand Illusion, France, Jean Renoir
1937 – 스텔라 달라스 Stella Dallas, USA, King Vidor
1938 – Comp-osition Class, Japan, Kajiro Yamamoto
1939 – Earth, Japan, Tomu Uchida
1939 – 니노치카 Ninotchka, USA, Ernst Lubitsch
1944 – 이반대제 Ivan the Terrible, URSS, Sergueï Eisenstein
1946 – 황야의 결투 My Darling Clementine, USA, John Ford
1946 – 멋진 인생 It’s a Wonderful Life, USA, Frank Capra
1946 – 빅슬립 The Big Sleep, USA, Howard Hawks
1948 – 자전거 도둑 The Bicycle Thief, Italy, Vittorio DeSica
1949 – The Green Mountains, Japan, Tadashi Imai
1949 – 제3의 사나이 The Third Man, UK, Carol Reed
1949 – 만춘 Late Spring, Japan, Yasujiro Ozu
50년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진정한 영화적 기술은 50년대에 이르러서 완성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배우들의 부담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카메라를 최대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트려서 텔레포토 렌즈로 최대한 잡아당겨서 찍었고,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했으며 본격적으로 날씨를 이야기의 한 캐릭터로 활용했다. 이전의 경력을 바탕이되서 그에게 어느 정도 권한이 주어지기 시작하자 그는 독재자적인 성향이 발동하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천황이란 별명까지 얻게 됐다.사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그를 일본영화계의 천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에 의해서였다. 좋은 의미로서 그를 칭한 표현은 완벽주의자 뿐이였다.
1950 – 오르페우스 Orpheus, France, Jean Cocteau
1951 – 카르멘 집으로 오다 Carmen comes home, Japan, Keisuke Kinoshita
1951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 USA, Elia Kazan
1952 – The Adultress, France, Marcel Carné
1952 – 오하루의 삶 Life of Oharu, Japan, Kenji Mizoguchi
1954 – 이태리 여행 Journey to Italy, Italy, Roberto Rossellini
1954 – 고지라 Godzilla, Japan, Ishiro Honda
1954 – 길 The Road, Italy, Federico Fellini
1955 – 부운 Floating Clouds, Japan, Mikio Naruse
1955 – Pather Panchali, India, Satyajit Ray
1955 – 키다리 아저씨 Daddy Long Legs, USA, Jean Negulesco
1956 – The Proud Ones, USA, Robert D. Webb
1958 – The Sun Legend of the End of the Tokugawa Era, Japan, Y. Kawashima
1957 – 젊은 사자들 The Young Lions, USA, Edward Dmytryk
1959 – 사촌들 The Cousins, France, Claude Chabrol
1959 – 400번의 구타 The 400 Blows, France, François Truffaut
1959 – 네 멋대로 해라 Breathless, France, Jean-Luc Godard
1959 – 벤허 Ben-Hur, USA, William Wyler
1960 – 동생 Her Brother, Japan, Kon Ichikawa
1960 – The Long Absence, France, Henri Colpi
1960 – Stowaway in the Sky , France, Albert Lamorisse
1960 – 태양은 가득히 Purple Noon, France, René Clément
1960 – Zazie, France, Louis Malle
1960 –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 Last Year at Marienbad, France, Alain Resnais
1962 – 베이비제인에게 무슨 일이? 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USA, Robert Aldrich
1962 –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USA, David Lean
1963 – 지하실의 멜로디 Any Number Can Win, France, Henri Verneuil
1963 – 새 The Birds, USA, Alfred Hitchcock
1964 – 붉은 사막 The Red Desert, Italy, Michelangelo Antonioni
1966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USA, Mike Nichols
1967 – 보니와 클라이드 Bonnie & Clyde, USA, Arthur Penn
1967 – 밤의 열기 속으로 In the Heat of the Night, USA, Norman Jewinson
1968 – 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 UK, T. Richardson
1969 – 미드나잇 카우보이 Midnight Cowboy, USA, John Schlesinger
구로사와의 라이벌과 반론들
구로사와의 전성기는 5,60년대였었다. 그의 걸작들은 실상 대부분 이 시기에 다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너무나도 잘나가고, 심지어 일본 영화계의 천황이란 별명까지 얻자, 그의 영화에 대한 몇몇가지 반론 또한 제기됐었다. 그의 영화에 몇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이였다.
일단 50년대 초 구로사와는 라쇼몽으로 서구사회에 아시아 영화를 거의 처음으로 소개했다. 그러면서 아시아 영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주목을 이끌어 냈는데, 이러면서 그가 자국 내에서 영화를 너무 서구인들 취향에 맞춰서 영화를 만든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좌파 감독 오시마 나기사였다. 그는 구로사와 영화에 격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왜냐면 그는 우익성향의 구로사와가 서구인들에게 영화를 정치적 선전도구로서 활용하면서 일본의 많은 것들을 외곡시키고 있다는 것이였다. 오시마 나기사가 감각의 제국을 만든 의도 중에 하나가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런 휴머니즘에 대한 경멸을 보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사실 서구적인 취향은 그가 서양 영화로부터 멋지고, 훌륭한 스타일과 기술을 차용해서 일본의 새로운 젊은 관객층을 공략하려고 했다는 말로 해명이 가능했었다. 하지만 진정한 일본 내 사회문제를 외면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다. 60년대 그의 영화는 현실 감각의 결여를 지적 받았다. 구로사와 자신이 보수적인 사람이다보니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통적인 일본적 사고방식 또한 딴지거리로 작용했다. 게다가 그는 한창 일본의 뉴웨이브 시네마가 활성화되던 시기에 그에 역행하는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그의 작품 도데스카덴의 실패 원인 또한 실상 그는 비주류 사회인들에 대해 주류인들의 시각으로 해석을 하다보니 제대로된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란 평가도 있었다.
특히나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는 일본사회 특유의 엘리트주의적인 성향이 녹아 있었는데,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그가 패배자들에 대한 영화를 진솔하게 만들었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트주의적이고, 감독으로서 독재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의 개성보다는 전체주의를 더 고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였다.
그리고 구로사와 덕분에 일본 영화가 세계로 알려지자, 서양인은 또 한명의 독창적인 일본인 감독을 발견하게 됐다. 그 것은 미조구치 겐지로 구로사와는 사뭇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였다. 그리고 곧바로 비평계는 둘 중에 누가 더 훌륭하냐는 경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조구치 겐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대중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서구의 비평가들은 단연코 미조구치 겐지를 진정한 일본 영화에 대표적인 인물로 꼽았었다.
1970 – 매쉬 M.A.S.H., USA, Robert Altman
1971 – 쟈니가 총을 얻다 Johnny Got His Gun, USA, Donald Trumbo
1971 – 프렌치 커넥션 French Connection, USA, William Friedkin
1972 – 벌집의 정령 The Spirit of the Beehive, Espagne, Victor Erice
1972 – 솔라리스 Solaris, URSS, Andreï Tarkovski
1973 – 자칼의 날 The day of the Jackal, USA, Fred Zinnemann
1974 – Conversation Piece, Italy, Luchino Visconti
1974 – 대부 2탄 The Godfather, part 2, USA, Francis Ford Coppola
1974 – Sandakan N°8, Japan, Kei Kumai
1975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One Flew Over the Cuckoo’s Nest, USA, Milos Forman
1975 – The Travelling Players , Greece, Theo Angelopoulos
1975 – 베리 린든 Barry Lyndon, USA, Stanle Kubrick
1976 – Lullaby of the Earth, Japan, Yasuzo Masumura
1977 –애니 홀 Annie Hall, USA, Woody Allen
1977 – 피아노 연주자를 위한 미완성 협주곡 An Unfinished Piece for a Player Piano, URSS, Nikita Mikhalkov
1977 – 빠드레 빠드로네 Padre Padrone, Italy, Paolo & Vittorio Taviani
1980 – 글로리아 Gloria, USA, John Cassavetes
1980 – A Distant Cry From Spring, Japan, Y. Yamada
1982 – La Traviata, Italy, Franco Zefirelli
1982 – 화니와 알렉산더 Fanny and Alexander, Sue-FR-Ger, Ingmar Bergman
1982 – 위대한 피츠카랄도 Fitzcarraldo, Ger, Werner Herzog
1983 – 코미디의 왕 The King of Comedy, USA, Martin Scorsese
1983 –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Japan, Nagisa Oshima
1984 – 킬링 필드 Killing Fields, UK, Roland Joffé
1984 – 천국보다 낮선 Stranger Than Paradise, USA, Jim Jarmush
1984 – Tung-tung de jiaqi, Taiwan, Hou Hsiao Hsien
1984 – 파리 텍사스Paris, Texas, Ger, Wim Wenders
1985 – 위트니스 Witness, USA, Peter Weir
1985 – The Trip to Bountiful, USA, Peter Masterson
1985 – 아빠는 출장 중 When Father Was Away on Business, Yug, Emir Kusturica
1987 – 죽은자들 The Dead, USA, John Huston
1987 – 내 친구의 집은 어디에 Where Is the Friend’s Home?, Iran, Abbas Kiarostami
1987 – 바그다드 까페 Bagdad Cafe, Ger, Percy Adlon
1987 – 8월의 고래 The Whales of August, USA, Lindsay Anderson
1988 – 허공애의 질주 Running on Empty, USA, Sidney Lumet
1988 – 이웃집 토토로 My Neighbor Totoro, Japan, Hayao Miyazaki
1989 – A-Un, Japan, Yasuo Furuhata
1991 – 누드모델 La belle Noiseuse, France, Jacques Rivette
1997 – 하나-비 Hana-bi, Japan, Takeshi Kitano
이렇게 보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스타일이 시대가 변하면서 바뀌게 된 그 영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싶다. 60년대 초기까지만해도 전형적인 할리우드 고전영화로부터 받는 영향은 줄어들고, 새로운 스타일의 뉴아메리칸 시네마로부터 큰 영감을 받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러면서 그는 보편적인 대중성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한 것 같다. 70년부터 그는 5년에 한 편 씩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다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이였다.
80년대 만든 카게무샤나 란같은 작품들은 크나 큰 스케일의 액션물이란 점에서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지만 이후로 만든 꿈이나 마다다요, 8월의 광시곡들은 전혀 대중들과 소통을 할 수 없는 가식적인 작품들이였다. 간간히 대부나 위트니스, 이웃집 토토로같은 작품들에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천국보다 낮선, 파리 텍사스, 누드모델과 같이 개인적이면서 실험적인 작품들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었다.
그래서 그의 후기작은 매우 개인적인 작품이였는데, 사실 그 것은 개인적이라기보단 위선적인 작품이였다. 진심이 없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또는 일본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가식적인 작품이였다. 그래서 진심없는 그의 그런 개인적인 작품들은 실패였다. 특히나 말년의 작품들은 너무나도 노인네 특유의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한 시선이 깊이 박혀 있어서 그가 동경한 개인적인 작품들 특유의 자유분방한 매력을 느끼기 힘들었다.
구로사와는 말년에 기타노 다케시와 굉장히 자주 접촉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만나선 실상 영화 얘기는 거의 안했다고 한다. 그래놓고 죽기 전에 다케시에게 일본 영화의 미래를 부탁한다는 식의 편지를 써놨다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보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보다 넓고 다양한 폭의 영화들을 만들어 놨기에 그가 이런 제한적이고, 일관된 스타일의 다케시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의외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구로사와는 다케시 영화 특유의 지극히 자신 만의 스타일이 강하게 돋보이는 개성이 부러웠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다케시는 영화를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고, 다른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지도 않았었다. 순전히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영화를 만들었었는데, 말년의 구로사와는 그처럼 개인적인 영화를 만들면서 개성이 존재하지 않아 꾸준히 실패를 거듭해 그의 이런 점을 부러워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사실 전성기의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는 당시의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대중 영화의 트렌드와 수준높은 예술 영화의 매력과 장점을 모두 이해하고, 그 것을 차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과연 말년의 그가 새로 바뀐 시대의 유행의 흐름을 그 어느 쪽이 됐건 잘 이해했을지 의심스러웠다. 만약 그가 8,90년대에 당시의 새로운 트렌드인 베버리 힐즈 캅, 다이하드, 터미네이터같은 작품의 매력과 기술력을 이해하면서 벤더스나 자무쉬의 영화를 좋아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가 그랬을지 의심스럽다. 내 생각엔 그의 몰락 또는 도태되는 시점이 바로 그 순간이 아니였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