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김원진 1970년대 말 YMCA 기계체조부에서 운동을 하기 시작, 이어 스턴트맨 생활은 시작했다.
왜소한 체격에 곱상한 외모 탓에 주로 여배우 대역을 맡는 일이 많았다.
스턴트맨 생활이 정확히 10년째 되던 해 한국판 <호소자>를 표방한 <용호취>의 주연을 맡게 된다. 청학동의 세 소년 용, 호, 취가 도둑맞은 마을의 석불을 찾아 서울로 상경한다는 내용이다. 맏형 용을 연기했던 그는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그 실력은 정말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렇게 기술은 당대 최고였지만 전반적인 영화계의 침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위한 본격 액션 영화들도 한국에서 자취를 감춘 안타까운 시기였다.
무술감독 정두홍도 머리 숙여 인정하는 선배 중 하나가 바로 원진이다. 그는 종종 입버릇처럼 “당시 충무로 스턴트맨들 사이에서 진이 형(원진)의 실력은 단연 최고였다. 왜 아직도 진이 형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건지 무척 아쉽다”고 말해왔다.
<슈퍼 홍길동>시리즈 등 당시의 액션 영화는 주로 아동용 영화 혹은 비디오용 영화로나 명맥을 유지했다. 이후 그 역시 <밥풀데기 형사와 쌍라이트>에 출연하게 된다.
원진의 최종적인 꿈은 홍콩 진출이었다. 무작정 중국어 학원을 다니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밥풀데기 형사와 쌍라이트>를 끝낸 다음 해 바로 홍콩 골든 하베스트사에 발탁돼 간 것이다. 한국과 홍콩 사이에서 영화를 수입하고 계약하는 일을 하던 지인의 도움으로 골든 하베스트가 정통 무술 영화를 연속 기획 중이란 얘기를 듣게 됐다.
지인을 통해 자신의 액션 동작들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골든 하베스트로 보냈고 만족스러워한 제작진이 그를 찾아왔다. 계약은 단번에 성사됐고 그는 <가자왕>의 메인악역 출연을 위해 홍콩 땅을 밟게 된다. 당시 홍콩 액션 배우들 사이에선 ‘대부’나 다름없었던 유가량 감독과 함께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된 경험이었다. 그리곤 황정리, 황인식, 왕호, 권영문 등 한때 홍콩 무술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선배들이 속속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끊겼던 한국과 홍콩 액션 영화의 교류가 그로 인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동방불패>와 같은 날 개봉해 썩 좋은 성적을 거두지도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자왕>은 북미, 유럽, 동남아시아 등 전세계 액션 마니아들 사이에서 내용은 둘째 치고 스턴트 액션 수준만큼은 컬트적인 절찬을 받았던 영화다.
발차기로 인정받은 그였기에 원진은 특수 발차기를 줄기차게 연마했다. 공중에서 몸을 틀어 차기, 제자리에서 몇 번씩 흔들림 없이 차기 등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발차기를 선보였다. ‘한국에서 온 비행접시’라 불릴 정도로 그 실력은 남달랐다. 홍콩에서의 두 번째 영화는 원규, 여대위 감독의 <마담 캅스>이었고, 이후 원규, 여대위 감독의 <신조협려 2>출연을 위해 3개월 여 캐나다에 머물렀고, 가수량 감독의 <마등출영>에선 양조위의 상대 역을 맡았다.
그렇게 5년 정도 머무르다 한국에 돌아와 <귀천도>저예산 액션 활극 <고수>에 참여했다.
이윽고 대히트작 <조폭 마누라>에서 신은경의 대역을 도맡아 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홍콩에서의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홍콩 무술감독들이 끊이지 않고 초청의 손길을 보내온 것이다. 당계례 감독의 <차이나 스트라이크 포스>에서 곽부성과 함께 출연했고, <조폭 마누라>를 촬영하던 중엔 <가자왕>에서 호흡을 맞췄던(당시 배우였던) 전가락 감독의 초청으로 건너가 <무문제 2>에 출연했다. 마크 다카스코스가 출연하기도 했던 <차이나 스트라이크 포스>에서 원진은 2층 버스 장면에서 놀라운 액션을 선보였고, <무문제 2>는 원표와 더불어 <매트릭스> 시리즈의 ‘세라프’ 역으로 유명한 예성과 함께 출연했던 영화다. 비록 두 영화 모두 국내에선 제대로 소개되지 못해 아쉽지만,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녹슬지 않은 액션 연기를 선보였다.
다수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무술감독으로 활동중이고 <옹박>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한 스토리 라인이 있기보다 액션만으로도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는 ‘진짜’ 액션 영화를 만들어 보는 게 꿈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