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급할 때 참 곤란하겠다 싶은 노란색 원피스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내가 5층짜리 전각으로 들어갑니다. 무기는 쌍절곤 하나뿐. 각 층마다 각기 다른 무예의 고수들이 있고 그들을 꺾어야만 주인공은 붙잡힌 여동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최우형 감독의 1978년 작 [십자수권]입니다.
역시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성이 대형 로바다야키에 들어섭니다. 비슷하긴 해도 이번에는 상하 분리형 트레이닝복이라 화장실 걱정일랑 안 해도 되겠군요. 이 여성의 무기는 일본도. 그녀를 해치우기 위해 '크레이지 88'이라는 갱 조직이 로바다야키로 출동하고 거의 일당백에 가까운 대결이 펼쳐집니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의 제목은 [킬빌 vol.1]입니다.
이 두 작품의 원전은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1978)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의 두 예시 중 어떤 것이 표절이고, 어떤 것이 오마주인지 대략 가려낼 수 있습니다. [사망유희] 개봉 후 단 몇 달 만에 완성했다는 점이 놀랍긴 하지만 [십자수권]의 저 장면은 표절, [킬빌]의 '청엽정 결투' 장면은 오마주에 가깝지요.
그렇다면 기준이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를 볼 때 오마주는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두산백과사전)'이라고 합니다. 표절은 '다른 사람이 창작한 저작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도용하여 사용하여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발표하는 것(두산백과사전)'이구요. 이렇게만 본다면 [십자수권]의 제작에 참여했던 분들께서 울컥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소룡과 [사망유희]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고 말이죠.
문제는 존경의 표시도 정도껏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대개 영화 속 오마주란 특정 씬이나 대사, 소품, 혹은 일부의 설정에서 원작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수준으로 인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류승완 감독이 [다찌마와 리](단편)에서 사용했던 대사 "오늘 네 놈에게 오동나무 코트를 입혀주마."는 장고웅, 구봉서 주연의 코리안 웨스턴 [비바장고]에서 가져왔다고 하죠. 하지만 [다찌마와 리]가 [비바장고]에서 인용한 것은 단지 저 대사 뿐입니다. 많은 영화들을 통해 선배 영화인들에게 오마주를 바쳐온 대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도 [언터쳐블](1987)에서 [전함 포템킨](1925)의 '오뎃사 계단' 장면을 인용했습니다. 하지만 계단에서 액션이 벌어지고 유모차가 계단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상황만 같을 뿐 두 장면은 완벽히 다릅니다.
그런데 [십자수권]의 경우에는 영화의 적지않은 부분, 하이라이트 시퀀스를 거의 통째로 [사망유희]에서 가져왔습니다. 층을 오르며 고수들과 맞짱을 벌인다는 설정도 동일하고 심지어 주인공의 의상이나 무기까지도 같죠. [킬빌]에서는 우마 서먼이 단지 이소룡 스타일의 추리닝을 입었을 뿐 액션의 공간이나 대결구도, 무기까지도 달랐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이렇듯 빌려 온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고 영화의 나머지 부분이 충분히 독창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오마주로 인정하는 편입니다. 표절과 오마주, 혹은 표절과 패러디에 대한 저작권법 상의 판례도 딱 떨어지는 기준 없이 대략 이러한 상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원작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분량을 인용하였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데 원작을 떠올리는 정도만 차용하여야 하며(미국 판례), 원작의 잠재적 수요를 대체하거나 감소하는 효과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군요. 한 마디로 '널리 알려진 원저작물을 이용하면서 새로운 창작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저작권법상 컨셉이나 아이디어에는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유사한 것만 가지고는 문제제기를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표현의 방식'이고 그 방식을 검토해 표절 여부를 판별하는 거죠. (발췌,인용 <영화인을 위한 법률 가이드> 조광희, 안지혜, 조준형 지음, 시각과 언어)
하지만 논쟁은 언제나 미묘한 부분에서 발생합니다. 앞서 예를 든 [킬빌 vol.1]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그의 출세작은 [저수지의 개들](1996)입니다. 이 작품은 개봉되자마자 평단과 영화팬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만 한편으로는 표절이라는 비난에도 만만찮게 시달려야 했지요(해묵은 영화이긴 합니다만 아직까지도 안 본 독자 분들이 계시다면 이 문단을 건너뛰시기 바랍니다). 보석강도들이 등장하고, 경찰에 쫓기는데, 알고 보니 같은 강도들 중 하나가 경찰이었다는 줄거리가 임영동 감독의 1987년작 [용호풍운]과 같다는 것이었죠. 단지 줄거리만 동일한 게 아니라 강도로 잠복해 있던 경찰([저수지의 개들]의 팀 로스, [용호풍운]의 주윤발)이 총을 맞아 치명상을 입는다는 점이라든가, 영화 말미 내분이 일어난 강도들이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장면 등의 디테일까지 표절로 지적받았습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어렵습니다. 역시 쟁점은 '비록 [용호풍운]의 주요 설정을 가져온 [저수지의 개들]의 스타일도 나름 독창적인가 아닌가.'의 문제겠지요. 그리고 표절로 인한 저작권 침해 문제는 당사자의 고발이 있어야 법정에서 해결을 볼 수 있는 문제라 [저수지의 개들] 표절 시비는 아직까지 답이 나오지 않았고 영화팬들은 여전히 이 떡밥을 가지고 논쟁을 벌입니다. 당사자인 쿠엔틴 타란티노는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어느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죠. "훔친 것 맞다. [용호풍운]도 훔쳤고, 스탠리 큐브릭의 [킬링]도 베꼈다."
<출처:접속!무비월드 조민준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