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하면 액션영화를 떠올리는 게 된다.그렇게 된 데에는 쇼브라더즈의 공이 크다.
1930년대 부터 극장을 백 개 넘게 운영해왔던 '소씨' 가문은 싱가폴을 중심으로 한 극장배급업에서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 홍콩에 대형 스튜디오를 건립하였다.
소씨 가문의 막내, 흔히 런런 쇼라 불리는 소일부는 이 스튜디오를 기반으로 그때까지 홍콩영화의 주류였던 뮤지컬, 코미디, 사회파 멜로드라마를 탈피한 새로운 장르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다름아닌 무협영화 였다.
호금전의 <대취협>,장철의 <독비도>는 쇼브라더즈의 영화가동남아시아에서 확실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액션장면을 어떻게 찍을 지 몰라서 일본의 닛카츠와 토호에서 영화 스텝들을 초빙해 왔던 정도였지만
이 공장같은 쇼브라더즈 스튜디오에서 유가량, 당가, 한영걸 같은 초기의 무술감독들.그리고 이 무술감독들의 안무를 실질적으로 구현한 젊은 스턴트맨들이 함께 홍콩 액션영화를 '발명'했고
정패패,왕우,적룡,강대위등 수많은 스타를 보유하며 무협영화는 홍콩영화의 주류가 됐다.
여기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친 쇼브라더즈의 극장체인을 통해 소개 되었고
홍콩영화 하면 무협,액션이라는 공식이 만들어 졌다.
하지만 왕우를 비롯한 일부 스타들이나 감독들이 독선적이었던 소일부와 그의 애인 방일화 에게 반기를 들었는 그 와중 쇼브라더즈의 제작 본부장이던 추문회가 소일부와 싸우고 독립을 해버렸다.
왕우를 비롯,나유,왕천림 같은 감독들이 추문회가 만든 신생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골든하베스트의 탄생-
추문회가 만든 회사의 이름은 가화(嘉禾) 였다.영어로는 '골든하베스트'라고 했다.
71년 창립당시 골든하베스트는 쇼브라더즈와 똑같은 스타일의 무협영화를 찍고 있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쇼브라더즈의 'B'급 제작팀을 그대로 이끌고 독립한 셈인데 .. 그러다 보니 쇼브라더즈는 골든하베스트를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이소룡 이였다.
-이소룡의 등장-
70년 4월에 소일부를 찾아와 계약을 하려던 한 청년을 문전박대를 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소룡이다. 이 자신감에 넘치는 젊은이는 쇼브라더스에게 거절을 당하지만, 골든하베스트의 류량화에 의해서 전격 발탁이 된다. 바로 전설이 시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산대형>의 대히트로 런런 쇼는 자신의 실책을 자책하며 이소룡을 찾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운은 골든하베스트에게 기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쇼브라더스는 이소룡을 잃었지만 여전히 거대한 영화사였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동남아 지역 외에 해외 시장을 두드렸고,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천하제일권 -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다. 이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꼽는 최고의 영화 가운데 한 편으로 선정이 되었던 작품으로, 한국인 정창화가 감독을 한 작품이었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미국에 개봉이 되어 그 해 전미흥행수익 10위권 내에 들어가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쇼브라더스는 미국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한국에선 <철인>이란 제목으로 개봉이 되었고, 해외에서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능가하는 흥행작을 내놓는데 바로 허관문 주연의
<대군벌>이다. 이소룡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골든하베스트는 위기에 몰렸고 쇼브라더스는 여전히 막강했다. 하지만 소일부는 또한번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원조 희극지왕 허관문-
허관문은 대스타였다. 그러나 소일부는 그를 몰라봤다. <대군벌>의 히트 후 허관문은 독립프로덕션인 허씨형제공사를 설립했고, <귀마쌍성>을 공동 제작할 것을 의뢰하지만, 소일부는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다. 이에 크게 화가 난 허관문은 이소룡의 죽음으로 스타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골든하베스트를 찾아갔고, 추문회는 그의 상품가치를 단번에 알아보고 <귀마쌍성 - 미스터 부의 첫 번째 작품>에 공동으로 투자를 한다. 허관문의 데뷔작 <귀마쌍성>은 홍콩 박스오피스를 새롭게 쓰는 대히트를 기록하고, 런런 쇼는 이소룡의 경우처럼 뒤늦게 허관문을 찾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후 쇼브라더스는 유가량,유가휘,유삼 삼형제의 소림36방 같은 기록적인 히트작을 내놓기도 하였지만 이 삼형제만으로 버티기엔 무리가 있었고 그리고 또 젋은 스타가 막 골든하베스트에서 탄생하려 하고 있었다.
우점원이 이끌었던 '북경경극학원'의 원루는 갑작스런 다리 부상 때문에 몇 달 병원 신세를 졌다.
평소 못 먹던 사탕,쵸콜릿 이런 걸 입원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먹다 보니 살이 찌기 시작한 것.
퇴원할 무렵 이미 살이 너무 쪄..경극공연을 할 몸이 아니었던 것.원표,원화,원룡,원규 같은 사형제들을 뒤로 하고 쇼브라더즈 스튜디오에서 스턴트맨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바로 홍금보 이다.
-기회를 잡은 홍금보-
<대취협> 당시 호금전에 눈에 뛰어 어린 나이에 무술감독을맡기도 했던 홍금보는 60년대 후반부터 1970년까지 장철 감독이연출하지 않는 다른 영화들에서 스턴트맨 겸 단역배우로
커리어를 쌓아왔다.
그러면서 황풍이란 조감독을 만나게 되었고 그시기에 추문회가 골든하베스트를 만들고 독립하면서
홍금보도 적을 옮겨 골든하베스트에서 메인 무술감독으로 갑작스럽게데뷔하게 된다. 쇼브라더즈에 있었으면 쟁쟁한 사람들 뒤에서 한참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기회는 홍금보를 찾아왔고
홍금보를 영입하며 자연스럽게 그의 경극학원 사형제들이던
성룡,원표등을 영입할 수 있었다.
쇼브라더스의 쇠퇴기는 소일부와 방일화가 가져왔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소일부는 설립자이면서 쇼브라더스를 아시아 최고의 영화사로 만든 수완 좋은 인물이었지만,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고, 나누기 보다는 독점을 하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두려던 성격은 결국 자신이 만든 영화사를 궁지로 몰아간 이유가 된다. 경쟁자였던 추문회는 소일부와는 정 반대로 감독과 배우들을 대접했고,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또한 이익 분배에 있어서도 공정하게 함으로서 큰 신뢰를 쌓아 나갔다. 여기서 소일부, 그리고 쇼브라더스의 승패는 정해진 것이었다.
한 때 무협 영화로 아시아 최고의 영화사가 되었던 쇼브라더스. 이들은 제 발로 찾아온 복덩어리 이소룡을 거부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0년대 홍콩 영화계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스타가 된 허관문. 그리고 80년대 우뚝 솟은 큰 별, 성룡의 눈부신 성공은 그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결과적으로 그 시대를 이끌어갔던 대표적인 배우들을 거두어들이지 못한 런런 쇼의 실책은 후대의 귀감이 남는다. 그럼에도 소일부는 홍콩 영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텔레비전 진출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며, 영국 여왕으로부터 Sir 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 승승장구하던 골든하베스트도 중국자본에게 넘어가며 이제는 역사속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