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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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열전] 천황거성이라 불린 스타 [왕우] (1) 2011/08/10 AM 10:17

왕우는 1943년 3월 18일 중국 강소성 출생으로 본 명은 왕정권이다. 그는 17살 때 홍콩으로 이주했으며 1964년에 쇼브라더스에 들어간다. 학창 시절에는 수영 선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수구 시합중 상대팀과의 집단 난투극을 계기로 운동선수로서의 막을 내린다

같은 해 새로운 무협영화 스타일을 꿈꾸던 장철 감독의 <호협섬구>에 발탁되어 영화계에 데뷔하고 <독비도>로 최초의 100만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영화를 탄생시키며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다. 외팔이라는 무사로서의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대협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아시아의 젊은 관객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호금전의 <대취협>으로 시작된 ‘구파검극영화’의 거센 흐름의 물줄기를, ‘신파검극영화’로의 이행이라는 당시 홍콩 영화계의 시류 변화와 맞아떨어지면서 새로운 무협영화를 주도해나갔다.

<독비도>를 시작으로 홍콩 무협 영화는 왕우의 천하가 된다. 그로 인해 장철의 재능은 꽃을 피웠고, 두 사람은 이후로도 <대자객> <금연자> <독비도왕>과 같은 작품들을 연이어서 발표하며 쇼브라더스의 황금기를 이끄는 쌍두마차가 된다. 이 작품들을 통해 쇼브라더스는 아시아 지역 최고의 영화사로 발전을 했고, 신화의 주인공인 왕우는 스타가 아닌 신적인 존재로까지 대접을 받는다. 홍콩 사람들은 왕우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를 ‘천황거성(天皇巨星)’으로 칭한다.

당시 쇼브라더스의 사장 런런 쇼는 배우를 소모품정도로 생각하며 사원대하듯이 배우를 대했다. 이런 런런 쇼에게 감독을 하겠다고 배우가 덤벼 드는것은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 없지만 그의 엄청난 인기 때문에 관철 시키고 <용호의 결투>의 각본과 감독을 맡아서 엄청난 흥행을 이룬다,

흥행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에게 영행을 미쳐 이소룡의 <정무문>의 기본 스토리를 이 영화에서 따왔고 마지막 객잔에서의 결투는 킬빌1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났다.

영화계에 영향력도 대단해서 성룡이 감독나유와의 부당한 종신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미국으로 가자 나유는 흑사회를 동원해서 성룡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한다.그러자 왕우와 친하던 홍금보가 왕우에게 문제의 해결을 부탁해서 넘어 갈수 있었다. 성룡이 이에대한 보답으로 왕우가 제작한 <화소도>와 <대복성>에 출연을 했다.

하지만 범죄조직 흑사회와의 유착 관계, 임청하와의 스캔들, 그리고 상해사건,등의 좋지 않는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팬들은 왕우에게 실망감을 느꼈고, 그는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결정적으로 왕우가 홍콩을 떠나게 된 것은 런런 쇼에게 맞선 일 때문이다. 런런 쇼가 이끄는 당시 쇼브라더스는 배우들에게 불리한 조건의 개런티를 월급으로 지급을 하고 있었고, 이에 불만을 제기한 왕우는 법정싸움에서 패하면서 홍콩 영화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대만으로 떠난다. 천황거성으로까지 불리던 왕우의 너무나 초라한 은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는 대만에서 계속 영화 활동을 한다.

그후 <반생연>의 제작을 끝으로 영화계를 떠나 사업에 전념하다. 올해 진가신 감독의 <무협>으로 오랬만에 컴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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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습의 빨갱이    친구신청

그의 영어 이름인 '지미 웡'이 한 국제영화제에서 본 '김지미'씨에게 반해서 자신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라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사실여부는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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