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문이나 황비홍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 사실 그들의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하다고 한다.
특히 엽문의 알려진 행적은 홍콩으로 이주한 뒤에 알려진 사실이 거의 전부이고 본토에서의 행적은 영화에서 나왔던 북파 무술인인 금산조를 물리치고 일본군 무술교관이 되라는 것을 거부한 정도이다. 그럼 그나마 알려진 엽문의 실제 행적은 어떠할까.
1893년생인 엽문은 부유한 아버지의 저택에서 어릴 때부터 무예를 배웠다. 엽문은 어릴 때 영춘권의 대가 진화순에게서 몇 수 배운다. 얼마 안 되어 진화순이 중풍에 걸리자 어린 엽문은 사형 오중소에게서 본격적으로 영춘권을 사사받는다.
중국의 정세가 어수선할 때 엽문은 홍콩으로 건너왔고 그 곳에서 영춘권의 직계 인물 양찬의 아들 양벽을 만나서 영춘권을 배운다. 얼마 뒤 엽문은 불산으로 돌아와 장영성과 결혼한다. 엽문은 이후 불산에서 영춘권을 매일매일 익히며 기량을 높여간다. 그러다가 1938년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고 불산까지 점령당한다. 엽문집안이 고통 받기 시작한다.
엽문은 이 시절 불산의 부유한 상인 주청천의 도움을 받는다. 영화에서 임달화가 연기하던 인물이다. 엽문은 주청천의 어린 아들 주광유에게 영춘권을 전수한다. 이 시기 엽문의 행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군에게서 무술사범이 되라는 요구는 거절하였지만 영화처럼 일본군과 싸우지는 않았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엽문의 저택이 일본침략군의 본부, 총독부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실제 엽문의 저택은 괴뢰 남해현정부가 차지한다.
엽문은 이 시기에 국민정부에서 일한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한 상태에서 국민정부는 유지되었고, 모택동(공산당)과 장개석(국민당)이 치열한 내전을 펼칠 때의 복잡한 이야기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엽문은 국민당정부의 경찰국에서 근무한다. 그가 맡은 업무는 술집(기원) 세금수령, 군관학교 교관, 정보공작 등이었다. 1949년 대륙이 공산당에 의해 완전 점령되자 국민당 지지자인 엽문은 어쩔 수 없이 홍콩으로 도피한다. 견자단의 영화 <엽문>에서는 영화 마지막에 엽문이 주청천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트럭으로 불산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엽문 혼자의 야반도주였다. (정확히는 큰딸을 데리고 갔다) 이름도 한동안 바꾸고 홍콩에서 새로운 삶은 산다.
남겨진 아내와 아들은? 영화에서는 어린 아들 엽준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둘째 아들 엽정도 있다. 아버지가 홍콩으로 떠나버리고 이들은 대륙 해방을 맞았고 공산치하에 살게 된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떠나간 뒤 이웃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아야했다. 세상이 바뀌고 인심이 야박해진 것이다. 아버지 엽문은 홍콩에서 조금씩 영춘권을 퍼뜨리고 있을 때 중국에 남은 가족은 점점 더 불행해진다. 1961년 말에 엽문의 아내 장영성이 병으로 죽는다. (엽문은 홍콩으로 건너온 뒤 상해 출신의 여자와 동거/결혼한다) 그리고 엽준과 엽정 형제는 반우파 투쟁에서 화를 당하게 된다. 이들 형제는 홍콩으로 도망가기로 작정한다. (몇몇 홍콩영화에 등장하는데 당시 굶어죽기 일보 직전의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목숨 건 국경탈출을 시도한다) 마침내 엽준과 엽정 형제는 아버지 엽문과 재회한다. 13년 만에 말이다.
엽준과 엽문은 세상풍파를 다 겪었기에 아버지를 용서하였을 것이다. 새어머니를 ‘상하이 아줌마’라 부르면서 홍콩에 정주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도와 영춘권 도장의 사부로 활약한다.
영춘은 일반적인 남소림의 권술과 다르다. 영춘은 장기간의 리수연습을 거쳐야 하고, 리수의 가장 효과적인 훈련 방법은 개인 교습이었다. 따라서 제자가 적을 수 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교습비가 꽤 높았다. 일반계층이 부담할 가격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부잣집 자제만이 배울 수 있었고 당시 '소야권(少 爷拳: 도련님 권법)'이란 별명까지 있었다.
이런 이유때문에 영춘권은 광범위하게 퍼질수 없었지만 엽문이 홍콩으로 건너가 제자를 양성하면서 부터 영춘권은 중흥을 맞았다고 한다.
엽문이 홍콩에서 도장을 열었고 불세출의 쿵푸스타 이소룡이 그의 제자라고 해서 그가 엄청 큰돈을 번 것은 절대 아니다. 1972년 엽문이 그의 작은 집 소파에서 숨을 거둘 때 집안엔 7,200원이 다였고 자기 명의의 땅조차 없었다고 한다.
이런 국공대립의 극심한 시절 그 정치적 상황속에 휘말리는 엽문의 모습을 그리는 작품이 양조위.왕가위의 <일대종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스타일대로 영춘권을 바꿔서 전통 영춘권이 사라질껄 염려해 직접 시범을 영상으로 남긴 엽문 촬영은 그의 아들 엽준이 했고 이 촬영후 한달뒤 쯤 세상을 떠났다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