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고전 홍콩영화들에서 한국의 랜드마크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왜 그들은 한국을 로케이션 장소로 선호 했던 것일까
첫째는 현실적인 이유이다. 1960년대 이후 홍콩영화시장이 급격히 성장했지만 정작 홍콩에는 자연 풍경을 담을 야외라든가 사찰 같은 공간이 없어 무협영화나 시대극을 촬영하기에 애로가 있었다. 홍콩이라고 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열대 기후에 가까운 그곳에서 고무나무나 야자나무 숲을 배경으로 칼싸움 영화를 찍는 건 아무래도 우스운 노릇. 당시까지는 개방되지 않았던 중국 본토에 가서 찍을 수도 없었던 터라 자연환경과 고전 건축양식이 유사한 한국이나 일본을 로케지로 선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한국·홍콩 영화계의 긴밀한 관계 때문이었다. "흔히 '찬바라'라고 불리는 사무라이 영화들이 활극의 주를 이루었던 일본과 달리, 태권도·합기도 등 다양한 무술 스태프들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 또한 한국 로케의 장점"이었고 196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크린쿼터제가 시행되면서 영화사마다 수입할 수 있는 해외영화 편수가 제한된다.
-불국사에서 촬영한 호금전의 [공산령우]-
그 당시 홍콩 무협영화는 한국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터라 우리나라 수입사들로서는 발을 동동 구를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영화수입사들은 엄연한 홍콩영화를 한국영화로 둔갑시키는 편법들을 개발한다.
한국인 배우가 등장하기만 하면 합작영화로 인정해서 외화로 분류하지 않았던 당시 스크린쿼터 시행령의 맹점을 이용하여, 한국의 수입사들은 단역으로 출연한 한국 배우를 주연으로 둔갑시키거나, 영화와 전혀 관계없는 한국 배우 출연 장면을 찍어 무리하게 짜깁기하거나, 더빙을 통해 한국영화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소위 위장 합작영화들인데 한국 로케 촬영 작품들은 이런 위장이 더더욱 쉬운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철의 [흑객] 이나 [철수무정] 같은 영화들도 개봉당시에는 모두 한국·홍콩 합작영화로 알려졌었다. 이런 위장이 심해지면서 영화 크레딧에도 큰 혼선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관객들은 진짜 홍콩영화인지, 합작영화인지, 한국영화인데 홍콩영화인 척하는 것인지를 분간하기가 점점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한국감독 정창화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개봉 당시만 해도 '한국배우가 출연한 홍콩영화'로 잘못 알려졌고, 한국감독 장일호가 연출한 [생사투] 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장철 감독의 필모그라피로 분류되었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까지 위장합작으로 가속화된 홍콩영화의 한국로케는 일상적인 제작방식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어떻게 보면 무협영화의 황금시장인 한국을 포기할 수 없었던 홍콩영화계에서도 이러한 위장합작 행각에 일조한 셈이다.
성룡의 숱한 초기작들이 한국에서 촬영되었고 이소룡의 미완성 유작으로 남은 [사망유희]에서도 생전에 이소룡이 마지막 액션 시퀀스의 로케지로 선택했던 곳은 한국의 법주사였다. 하지만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그는 날씨가 풀리기를 기다려 [용쟁호투] 를 먼저 촬영했지만 영화의 개봉도 보지 못한 채 사망 하고 만다.
이후 무협영화들이 퇴조하고 현대물들이 홍콩영화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한국 로케물들도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