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 게임 화면. 영화를 기대하고 게임화면을 본 유저들은 경악해야 했다!
“1983년 상황은 뭐랄까... 마치 건물이 무너지기 전 비상구로 달려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타리가 덤핑 경쟁에 뛰어들면서 모든 것의 종말이 오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게임산업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액티비전 짐 레비 회장은 '아타리 쇼크'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1982년, 한해 동안 아타리는 6천 만 개의 게임패키지를 판매하며 실리콘 밸리의 기대주로 우뚝 섰다. 비디오게임 시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아타리는 자신들이 최고라는 믿음에 빠져 있었다. [퐁]을 만든 그들의 혁신정신은 불과 몇 년도 안 되어 현실안주로 변질됐다.
게임은 즐거움의 도구가 아니라 돈을 긁어모으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희대의 졸작 [E.T.]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1년 뒤 겪어야 할 엄청난 재앙을 모르고 말이다. 이번 회는 1980년대 전 세계 게임시장을 폐허로 만들어버린 [E.T.]와 ‘아타리 쇼크’에 관한 이야기다.
황금의 시대는 가고...
1980년대 초반, 세계 게임시장은 ‘황금의 시대’였다. 나오는 게임마다 대박을 쳤다. 게임 카트리지에 이름을 달고 나오면 무조건 팔리는 때였다. “쓰레기를 게임 카트리지에 넣어 팔아도 100만장은 나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게임센터에 들여놓은 게임기는 아이들의 동전을 빨아들이는 금고처럼 여겨졌다. 아타리는 그 정점에 있는 회사였다. 회사에는 돈이 흘러넘쳤다. 오죽하면 장난삼아 아타리 신용카드까지 만들어 졌다.
‘스티브 부시넬’이 창업한 아타리는 [퐁], [브레이크아웃]을 성공시키며 세계 최고로 발돋움 했다. 아타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VCS(Video Computer System)를 출시했다. VCS는 카세트(게임팩)를 꽂아 게임을 하는 최초의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다.
집에서 게임팩만 바꿔가며 다양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VCS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당시 미국 어린이들이 크리스마스 때 받고 싶어 하는 선물 1순위가 게임기였다. VCS의 누적판매수는 2천 6백만 대에 이르렀고, 인기게임의 경우 백만 단위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가정용 게임기 아타리 VCS.
1977년 7,5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아타리 매출액은 불과 3년 만에 스무 배가 넘는 22억 달러로 증가했다. [퐁]을 만든 알 알콘은 아타리의 전성기를 이렇게 말했다. “VCS의 일년 예상 매출액은 불과 4개월 만에 달성됐습니다. 마케팅 부서 직원들은 ‘죄송합니다. 물건이 다 팔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주 업무였을 정도죠.”
아타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업으로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재앙의 싹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그들이 위험을 알았을 때는 이미 ‘아타리호’의 침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정용 팩맨, 아타리 쇼크의 시작
[아타리팩맨]. 팩맨의 부진에서부터 아타리쇼크의 징후가 시작됐다.
1983년, 미국 게임시장을 몰락시킨 ‘아타리 쇼크’는 서서히 침몰해가는 타이타닉 호와 비슷하다. 이때는 비디오게임으로 포장만 하면 어떤 상품도 팔아먹을 수 있었다. 한 애완동물 식품회사는 개먹이 TV광고를 본뜬 어처구니없는 게임을 만들어 팔아먹을 정도였다. 아타리도 어리석긴 마찬가지다. 그들은 루빅큐브를 비디오 게임으로 내놨다. 회사 내부에서는 “3달러 주고 사면 언제든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즐길 수 있는 루빅큐브를 누가 40달러주고 비디오 게임으로 하겠는가.”라며 반대했다. 그래도 아타리는 게임발매를 밀어붙였다.
첫 번째 위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팩맨]에서 시작했다. 아타리는 아케이드용 [팩맨]을 VCS용으로 컨버전 해 출시했다. 그러나 졸속으로 만든 비디오게임 [팩맨]은 오락실에서 했던 게임과 너무 달랐다. 속도가 턱없이 느렸고, 중간에 캐릭터들이 사라지는 버그도 있었다. [팩맨]은 이름값 때문에 700만장 이상 팔렸다. 그러나 그 성공 이면에는 불안한 조짐이 있었다. 형편없는 게임에 실망한 사람들이 환불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타리는 유저들의 불만을 별것 아닌 것으로 넘겼다. 배가 침몰하는 걸 모르고 파티만 즐겼던 타이타닉호 사람들처럼, 당시 아타리는 [팩맨]에서 어떤 위기감도 감지하지 못했다.
처참한 실패작 E.T., 아타리를 몰락시키다
1980년대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 ‘E.T.’. 영화사에선 가장 찬란한 이름이지만, 게임역사에선 처참한 실패의 대명사다. VCS용 [팩맨]으로 재미를 보자, 아타리는 더 큰 도박을 감행한다. 확실하게 돈을 뽑을 흥행카드가 필요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이 스티븐스필버그의 히트작 ‘E.T.'였다. 세계적으로 초대박 흥행을 기록한 ‘E.T.’는 도저히 실패할 수가 없는 타이틀이었다. 아타리는 무리하게 계약을 서둘렀다. 무려 2,500만 달러라는 거액의 로열티를 지급하고 판권을 사들였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로열티에 너무 많은 돈을 쓴 나머지 정작 게임 개발비가 부족했다. 그래도 아타리는 그 해 크리스마스 대목을 노려 게임출시를 강행했다.
개발기간으로 주어진 시간은 6주였다. 그러나 6주가 아닌 60주가 걸려도, 사람들이 E.T.에 가지고 있는 기대감을 충족시키기는 힘들었다. 경영진은 초도물량으로 500만장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당연히 회사 내에서 반대가 심했다. 아타리 내부에선 누구도 [E.T.] 개발팀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게임역사상 가장 조악한 졸작으로 치부되는 아타리의 [E.T.].
[E.T.] 게임팩. 절대 포장만 믿고 게임 사지 말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다.
경영진은 팀을 급조해 졸속으로 게임을 만들었다. 게임은 일주일 앞당겨 5주 만에 나왔다. 아타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요란하게 게임을 광고했다. 세상에 나온 [E.T.]는 충격 그 자체였다. 한마디로 허접함의 극치였다. 느린 게임진행과 조악한 그래픽을 본 유저들을 공황상태에 빠졌다. 툭하면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멍청한 캐릭터 때문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사람들은 이름값 못하는 [E.T.]에 분노했다. 곳곳에서 환불소동이 벌어졌고, 게임에 대한 악평이 쏟아졌다. 심지어 불매운동까지 벌어졌다. [E.T.]는 아타리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불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이 불신은 게임 전반으로 이어졌다.
“아타리 쇼크”
'아타리는 넘쳐나는 재고를 감당하지 못해 뉴멕시코 사막의 쓰레기 매립지에 수백만 장의 게임팩을 파묻어버렸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초조해진 아타리는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수준낮은 게임을 대량으로 찍어냈다. 하나만 걸리라는 심산이다. 다른 게임사도 사정은 비슷했다. 마치 경쟁이나 하듯 질 낮은 게임을 쏟아냈다. 결과는 참혹했다. 누구도 비디오게임을 사려 하지 않았다. 업체들은 재고처리를 위해 덤핑 경쟁에 뛰어들었고, 그걸 수록 시장에서 외면 받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수백 만 개의 게임팩이 팔리지 않고 창고에서 썩었다. 넘쳐나는 재고를 감당하지 못해 뉴멕시코 사막의 쓰레기 매립지에 수백만 장의 게임팩을 파묻어버릴 정도였다. 게임산업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린 것이다.
재앙은 아타리 하나로 끝나지 않고,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1983년, 아타리는 3억 5,600만 달러의 적자를 보고 직원 1만 명 가운데 3000명 이상을 해고 했다. 2억 100만 달러의 적자를 본 ‘마텔 일렉트로닉스’는 직원 1,800명 가운데 37%를 감원시키는 것도 모자라 결국 회사가 폐쇄됐다. 신생업체 ‘액티비전’도 500만 달러의 적자를 봤다. 아케이드 게임 선두 업체 ‘볼리’ 사도 수익의 85%나 감소했다.
그나마 큰 회사들은 감원 정도로 끝났지만, 이들에게 게임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나 작은 개발사들은 줄줄이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신생회사에 불과 했던 일렉트로닉 아츠(EA) 창업자 트립 호킨스는 “아타리의 추락과 함께 망하거나 사업을 포기하는 회사가 줄을 이었고,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비디오게임은 끝장났다고 생각했다”며 “사태가 회복되기까지는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1982년 30억 달러를 육박했던 비디오게임 시장은 불과 1년 만에 1억 달러 규모로 축소됐다. 1983년 한해 아타리는 5억 36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그리고 1984년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은 아타리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한때 세계 최고의 게임사로 군림했던 아타리의 말로는 이렇게 초라했다.
게임의 본질은 ‘재미’
아타리 쇼크는 게임의 본분을 망각한 게임사의 미래가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보여준다. 1970년대 중반까지 아타리는 가장 혁신적 기업의 선두에 있었다. 최초의 상업용 전자게임 [퐁]을 만들었고, 스티브잡스의 롤 모델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성공에 도취한 아타리는 혁신을 멈췄다. 창업자 부시넬이 회사를 떠난 후 아타리는 관료주의적 조직으로 변했다. 부시넬을 이어 아타리 CEO에 오른 ‘레이 카사르’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걸 만들까’보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팔아먹을까’를 고민하는 전형적인 마케터였다.
그러다보니 재미는 뒷전이고 그저 잘 팔리는 게임으로 매출 올리기에만 급급했다. 질 낮은 게임이 수없이 양산됐고, ‘뭐 하나 대박치겠지’라는 막연한 한탕주의까지 보태져 산업의 몰락을 부추겼다.
‘아타리 쇼크’는 게임의 본질은 ‘재미’이고 그것을 망각하면 철저하게 외면 받는다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교훈을 역사에 남겼다. 게임은 팔아먹는 도구가 아닌 즐거움을 주는 도구다. 필자가 ‘아타리 쇼크’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아직도 이 간단한 진리를 잊고 있는 게임사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한편, 거함 아타리의 몰락은 일본의 작은 게임사 닌텐도를 깨웠다. 닌텐도가 목숨처럼 지키는 ‘재미’에 대한 신념은 아마 아타리에서 얻은 교훈일 것이다. 아타리 쇼크의 폐허 속에 닌텐도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음 회는 [동키콩], [슈퍼마리오]를 낳은 닌텐도의 화려한 시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자료러셀 드마리아, 조니 L. 윌슨, 송기범 역, [게임의 역사], 제우미디어, 2002.스티븐 켄트, 이무연 역, [게임의 시대], 파스칼북스, 2002.김영한, [닌텐도 이야기], 한국경제신문사, 2009.정지훈, [거의 모든 IT의 역사], 메디치미디어, 2010.위키피디아 ‘아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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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시장이 크고 활발해서 쓰레기게임을 만들어도 100만장은 팔림.
2. 그러다 보니 게임의 질보다는 일단 찍어내고 보자는 식의 행태가 만연하게 되버림.
3. 결국 문제의 게임. E.T가 등장. 참다참다 못한 소비자들이 슬슬 게임을 안사기 시작함.
4. "미국문명님의 황금기가 종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