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
무관심과 외면의 거리에서 오늘도 한 영혼이 고통 속에 유린당하고 있었다.
“일어나 이 찐따 새.끼야.”
사회 어디에서나 흔히 있는 이야기.
남들보다 조금 더 힘이 있는 아이 여럿이 남들보다 조금 더 힘이 약한 아이 하나를 악랄하게 괴롭히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집에 돈도 많은 새끼가 돈 빼고 ㅈ도 없는 개ㅁ끼가 이젠 사람 말을 생까네? 뒤질라고? 야 이 ㅈ같은 개ㅁ끼야. 넌 산수도 못하냐? 시.발 꼴찌인 나도 신사임당 네 장이 20만원인건 알아! 근데 시발? 이게 얼마라고 개ㅁ끼야?”
도움도 구원도 없는 괴롭힘의 나날들...
도움을 청해도 근본적인 변화 없이, 해결도 없이 그저 똑같이 흘러갈 뿐이었다.
“야. 말이 안 통한다. 이 새.끼 가방 털어봐!!”
“자, 잠깐만!! 알았어!! 기다려!! 줄게! 가 가방에 있어! 줄게!!!”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야!! 이 개 미.친.. 미.친 새.끼!!! 쳐 돌았어 이 새.끼!!!!!!!!”
“너 이 C발.. 그.. 그거 쏠 줄은 아냐? 이개....”
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
그 골목에 세발의 총성이 울린다.
그리고 다시 한 발 더..........
[의뢰.]
“세상 참 말세로다.”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비며 남자는 혀를 끌끌 찼다.
양발을 불량하게 책상위로 올린 사내의 무릎 위에는 신문이 펼쳐져있었는데, 신문 일면엔 대문짝만한 크기로 지난주 벌어진 끔찍한 사건사고를 다루고 있었다.
이미 재떨이에 담배꽁초는 수북이 쌓이다 못해 무너지지 않을까 위태로울 정도였으나,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웁 하고 담배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신 남자는 신문을 한쪽에 치워두고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채,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10평이 조금 될까 말까한 비좁은 사무실은 물품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손님 접대를 위한 소파와 커피테이블, 자신의 책상과 의자, 그리고 잘 닫히지 않는 서류 수납장과 수돗물을 끌어다 쓰는 정수기가 전부였다.
그나마 손님이라고는 거의 찾아오지 않는 그런 사무실이었기에 소파는 사내의 개인 침대로 변한지 오래였고, 커피테이블 위에는 라면과 3분 요리를 끓이기 위한 가스버너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심하게 담배를 쭉 들이 마시던 사내의 눈에 정수기 위에 붙여진 ‘금연’ 이라는 경고 팻말이 들어왔다.
당연히 사내가 달아놓은 것은 아니다.
팻말을 쓴 장본인은 따로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사내는 그제야 팻말위에 있는 바늘 시계를 바라보았다.
바늘은 이제 막 여덟시 삼십분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팻말의 주인이 올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제 곧 오겠구먼.....”
팻말을 쓴 장본인. 녀석은 항상 정확히 8시 30분에 출근하는데, 항상 녀석은 문을 열자마자 연신 심한 기침을 해대며 지독한 담배연기로 가득 찬 사무실의 열악한 환경을 불평하곤 했었다.
이번에도 눈물을 글썽이며 잔소리를 해댈 녀석을 생각하며 사내는 짐짓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사내의 귀에 닫힌 철문 너머로 작지만 명확하게 톡톡톡 하고 운동화를 신고 계단을 뛰어오르는 가볍고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녀석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실 문을 힘차게 벌컥 열고 나타난 녀석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랐다.
“너.. 그게 무슨 요상한 꼬라지냐....?”
상대방이 던지는 귀엽고 활기찬 ‘좋은 아침!’ 인사를 무시하며 사내는 녀석의 꼬락서니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어깨까지 오는 짧은 단발머리에 특별히 외출에 신경을 쓴 듯한 캐주얼 하면서 화사한 색상의 옷차림이 돋보이는 여성은 바로 이 사무실의 유일한 직원인 한상희였다.
그러나 지금, 화사한 옷차림보다도 더욱 사내의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은 바로 그녀가 얼굴에 쓰고 있는 군용 방독면이었다.
하지만 상희는 사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곧바로 창가를 향해 걸어가 힘차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환기를 시작했는데, 모든 창문을 다 열고 난 이후에야 방독면을 벗어보였다.
그리곤 몹시 갑갑했다는 듯이 푸하 하고 심호흡을 하고선 능숙하게 방독면에서 정화통을 배서 사내의 얼굴에 들이 밀었다.
“뭐긴 뭐예요? 들어올 때마다 담배연기로 너구리굴이니 이제 나도 적응을 하는 거지.
필터 시커먼 거 보여요? 안보여요? 당장 오늘 신후 선배가 폐암으로 안 죽는 게 신기할 지경이라구요.“
“죽긴 내가 왜죽어? 내가 누군데? 총알도 수류탄도 피하는 불사신 유신후라고.”
능청스러운 신후의 대답에 상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등에 메고 온 가방에서 방독면 가방을 꺼내어 방독면을 집어넣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총알도 수류탄도 피해가시는 불사신 유신후씨가 담배피우다 죽으면 참 재밌겠네요. 선배. 선배 나이가 올해 몇 살이에요? 스물일곱이시죠? 근데 선배가 지금 몇 살로 보이는 지나 아세요?”
“아우 또 뭐 나이까지 들먹이고 그래? 나 겉늙어 보이는거 잘 알아요 좀. 그만!”
“아시는 분이 그리 피워대세요? 선배가 담배 피다 죽으면 북쪽에 있는 리동철이가 퍽이나 좋아하시겠네요!!”
소파위에 널부러진 이부자리와 커피테이블 이의 가스버너 및 냄비 등을 치우며 상희는 총알 같이 잔소리를 쏘아댔다.
특히 리동철, 유신후가 끝내 승부를 보지 못했던 그 이름까지 들먹이며 유신후를 자극했지만, 이는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 빨갱이보다 먼저 죽으면 내가 걔한테 화환 안보내도 되잖아! 아, 내가 걔한테 먼저 보내면 어떡하나, 돈도 들고 부조금도 내야하나 했는데, 잘됐네. 되려 그놈이 나한테 보내야 되잖아?”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농담은 아닌데.. 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지만, 내뱉어봐야 욕만 먹는 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는 신후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상희도 신후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가방에서 노트북과 서류 파일을 꺼내 커피 테이블 이에 올려놓았다.
“주말에 서울에 다녀왔어요.”
“황금 같은 주말에 서울이라.. 서울 나들이는 잘했어?”
무심하게 묻는 말에 기가 찬 상희가 곧바로 반박했다.
“나들이요? 나들이는 무슨 일하러 갔거든요?!”
“일? 일은 왜?”
“왜긴 왜겠어요? 일이라곤 눈꼽만큼도 안하시는 우리 유신후 소장님을 대신해서 회사를 먹여 살리려는 애사심 넘치는 사원의 발버둥이죠!!”
“어이구 그러셨어요? 주말에 같이 만날 남자친구 하나 없으셔서 그러신 건 아니 시구요?”
“주말에 밖에 한 번도 안 나가고 사무실에 처박혀있는 누구보단 났거든요?”
신후의 노골적인 비아냥이 있었지만, 상희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신후의 사무실에 들어온 지는 고작 한 달 남짓한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티격태격 해온 만큼, 오늘의 일도 그저 평범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었다.
게다가 둘은 이 사무실에서 만나기 전에도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던 사이였다.
“어디 우리 유능한 사원님이 어디서 어떤 일을 따내셨는지 한번 알아나 볼까? 자 얘기해봐.”
“내려오셔서 서류나 읽어보시죠?”
“부하 직원이 사장한테 제출해야지?”
“됐네요. 어차피 읽지도 않잖아요. 선배는.”
상희는 혀를 차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북한의 내전 이후 불안정한 북쪽의 치안을 관리하기 위해 민간 경비업체에 한하여 부분적으로 총기허가가 이루어진 이후 신후도 군 특수부대 경력과 전공을 내세워 면허를 취득하고 소규모 경비 회사를 차린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몸을 쓰는 것 이외의 일에는 영 어두웠던 탓에, 그 후 변변한 일도 따내지 못한 것은 물론, 일을 해주고도 돈을 떼이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운영의 극치를 보여주며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같은 부대 행정 출신인 상희가 오기 바로 전까지............
“이번 일은 말이죠. 정말로 중요한 일이에요.”
다시금 단단히 강조하며 상희는 설명을 시작했다.
“민간 경비업체들 중에 상당히 큰 규모인 지오 세이프티라는 회사가 한 달 전에 총기 사고를 일으켜서 논란이 된 사건이 있었어요.”
“총기사고...? 지오세이프티? 그럼 이걸 말하는 건가??”
신후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보던 일간지의 사건 사고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기사 내용은 지면상 날짜로 지난 주말 발생한 청소년 총기 사고를 다루고 있었다.
모 보안 경비업체의 팀장 아들이 분당의 자택 골목에서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일진들을 미리 몰래 빼돌린 권총으로 둘을 죽이고 하나에겐 큰 부상을 입힌 후, 자신은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민간 경비 업체의 총기 허가와 관리 실태에 대해 성토하고 있었는데, 바로 신후가 상희가 오기 전까지 펼쳐보며 혀를 차고 있던 그 사건이었다.
‘한 달 전이라니.. 오늘 신문이 아니란 말인가.....’
“맞아요. 지오세이프티는 그동안 직원 개인의 관리부실로 몰아오고 있었지만, 계속된 수사에 결국 업체 전체의 관리 부실과 각종 비리가 동아줄처럼 줄줄줄 엮여 나왔거든요!! 그쪽에는 참 안된 일이지만, 덕분에 지난주부터 계속 일거리를 찾아오던 우리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가 온 거죠!”
상희는 가슴을 쫙 펴고 의욕적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지오 세이프티는 말이죠. 개성공단과 그 근교 해주시 등등을 담당하던 3천명 규모의 큰 회사에요. 그 구역들 중 일부가 지난달 사건에 대한 징계 심사로 일차 징계로 면허 정지가 떨어졌고, 이 면허 정지 조치로 인해 이 구역들이 모두 치안 공백 사태에 직면할 거라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건 이 면허정지가 일차 징계라는 사실이군.”
“그렇죠!”
상희는 손바닥을 짝! 하고 맞장구를 치며 응수했다.
평상시엔 대단히 차분하지만, 한번 자신이 생각하는대로 흐름이 이루어지거나, 기분이 좋아지면 나오는 그녀의 버릇 중 하나였다.
“사회적으로도 총기허가는 비록 일부라고 한들, 반대여론이 굉장히 심한 제도야. 이에 관련된 사건 사고는 아주 엄격하게 처리하지. 이번 같은 큰 사고에 일시적 면허정지로 끝난다는건 어불 성설이겠지.”
신후는 일간지의 기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분명 감사 이후에 추가 징계가 있을 거고, 결코 가볍진 않을 거야!”
“경우에 따라선 지오 세이프티가 맡던 지역들을 계속 다른 업체들이 점유할 수도 있다는 거죠.”
지오세이프티의 총기사고로 인한 긴급 치안공백으로 인해 담당계약구역을 일시적으로 분양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기회였다.
물론, 모든 구역을 1인 사무실에 불과한 유신후 측이 차지할 수는 없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 최소한 괄목할만한 실적만큼은 거두자는 것. 이것이 상희의 계산이었다.
총기 면허정지 30일. 여기에 추가로 이어질 징계와 자신들의 업무 수행에 따라 장기 계약으로까지 갈 수도 있는 만큼, 상희가 강조했던 중요성과, 그녀가 보여준 의욕적인 태도는 충분히 타당한 것이었다.
“좋아. 그럼 이번에 맡은 곳은 어디지?”
상희는 잠시 서류를 넘기며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황해도.. 해주. 해주 아시죠? 선배도 한창 근처에서 고생했었잖아요. 그쪽 공단 재건 지역 중 한 블록이요.”
“....왜 하필 거기냐. 북쪽 말곤 없냐?”
“지오 세이프티가 맡은 쪽은 *북조선 민주공화국 지역밖에 없는 거 모르세요.”
“안하면 안 되냐?”
신후는 상희의 조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북쪽은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안 좋은 기억이 가득했기 때문에 도저히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희는 신후의 불평에 말없이 서류를 들어보였다.
서류 앞면엔 고딕체로 크게 ‘통일부’ 라고 정부 부서명과 마크가 인쇄되어 있었다.
“아시겠어요?”
“.....”
“이번 일은 어디 하청이 아니라고요. 중앙정부에서 긴급 수주를 낸거라구요. 게다가 우리는 원래 여기에 명함도 못 내밀 그런 업체인거 아시죠?”
“상희 너.....”
상희의 말대로 영세하다 못해 일반 경비의뢰조차 받지 못하는 신후의 사무실이 정부부처의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전에 군에 있을 때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던 녀석인 만큼 이번에도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번일은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분명히 신후가 예상하는 그의 과거에 대한 부적절한 사용이 있었으리라 생각한 그는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상희 역시 지지 않았다.
“실적이 있어야 일감이 있고, 일감이 있어야 실적을 쌓죠!!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인가요?!”
대답하지 못하는 신후를 향해 상희는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조사 많이 했어요! 그 지역은 지오에서 맡는 동안에도 큰 사건하나 없는 조용한 곳이었어요. 이번에도 큰 문제만 없다면 행정상으로도 문제가 없을 거고, 사소한 사건 정도는 선배 실력이면 충분히 처리하잖아요! 윗사람들도 저랑 선배를 알고 있고, 그런 배경도 다 아니까 모처럼 기회를 준거라구요. 이번일 만 아무 일 없이 끝나면 다 괜찮아요!!”
상희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신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과거의 기억이 그를 자꾸만 옭아 메었지만, 이 일을 거절할 수도 없었고 거절할 이유조차도 없었다.
허공을 날아올라 흩어져 부서지는 아지랑이를 눈으로 쫓던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버렸다.
“정부에서 직접 들어간 거면 이제 와서 뺄 수도 없지……. 앞으로 영원히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테니까……. 그래. 언제부터 시작이냐?”
신후의 태도를 본, 상희는 활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오늘 저녁부터요.”
*북조선 민주 공화국
-작중으로부터 1년전 벌어진 북한 내전 사태가 휴전으로 끝나고 비교적 개방적이며 친남을 표방하는 장현동 장군이 세운 국가.
-평양과 개성 해주 및 휴전선 일대 접경지대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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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부터 조금씩 조금씩 써보던걸 정리해서 올려봅니다.
상희양 방독면 장면은 제 눈이 다 매워지는 느낌이군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