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없는 짓이다. 오히려 잘된거야'
몇번이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사람의 마음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는 법.
마음이란 소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니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말장난인가 싶지만, 보고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응답 없는 폰만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다.
벌써 스마트폰의 카카오톡과 바탕화면을 왔다갔다한지가 수십번째.
회의를 하면서도, 업무 화면을 보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눈 한켠으론 스마트폰 화면을 힐끔 거리면서 신경쓰다가 카카오 스팸메세지로 화면이 번쩍이면 화들짝 놀래 화면을 보다가 가슴을 쓸어내리기가 부지기 수.
누가봐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이 원인을 이야기 하자면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때는 그제 밤의 일이었다.
집 회사 집의 생활을 반복하던 나의 일상에 추가된 최근의 작은 변화.
사귄지 얼마 안된 애인과의 저녁 전화 통화.
이 성실한 생활 습관에 적응된지도 일주일은 족히 되어 이제 어엿한 패턴의 하나로 자리잡아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통화의 내용은 사실 별거 없다. 오늘 어떤일이 있었는지 푸념을 들어주고 푸념을 이야기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농담하고 농담받고 서로 감정의 흐름을 주고 받던 중에 여친이 문득 내뱉은 [나 고민이 있는데 말이야]라는 말 한마디만 빼고는 정말 별거 아닌 내용이었다.
무미무취하게 이어지던 통화속에서 튀어나온 어두운 색깔에 정신을 바짝차리고 귀를 기울인다.
어두운 색깔속에서 튀어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심장을 파고 후벼든다.
[최근 연락해오는 남자가 있어. 난 별로 관심이 없는데, 자꾸 연락해. 이제 그만했음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할까]
싫은 내용이다.
경험상 이건 진짜 연락해오는 남자가 있거나 한게 아니라, 나를 두고 하는 농담,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짖궂은 장난임에 틀림이 없다.
이 다음에 내가 이러이러하게 하라 라고 이야기를 하면, 분명히 '그럼 오빠하고 연락 끊어야겠네' 라고 대꾸하겠지.
[그럼 오빠하고 연락 끊어야겠네.응. 진짜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행동이다. 다음에 이어질 말도 당연히 알고 있다. 내가 짐짓 삐진척을 한다면 농담이라고 나를 달래주려 할게 분명하다.
[에이 삐졌어? 농담이야! 헤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마음은 벼랑끝을 오르내린다.
분명히 농담일게 확실하지만, 만에하나 그게 아니었다면 어떡하지? 사귀자고 할때도 설명하기 어려운 찜찜한 뒷맛이 있었다.
내가 가진 자격지심인지, 소심함이 원인인지 모르겠지만 아직 덜마른 콘크리트 같은 이 관계는 조금만 삐그덕 거려도 쉽사리 깨져버릴것만 같은 느낌이 간혹 도사릴 때가 있었다.
쟤가 한 말에 뼈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농담이 그냥 나올 수 있는가 온갖 물음표가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대범한 척 이라는 굳은 심지가 그런 요란한 소리들을 억눌러 버린다.
이 이후로 1시간 정도 통화를 계속하고 잠든게 그제의 일.
그리고 어제 아침도 평소처럼 카카오톡으로 아침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가다가 문득 튀어나온 카톡이 있었으니 바로 그제의 재탕이었다.
[어 근데 그 남자가 또 연락하네.]
<단호하게 끊어>
[그래야겠어. 오빠 행복하세요. 차단.]
대범함 이라는 간판으로 억눌러왔던 덜 마른 콘크리트가 요동치며 흔들렸다.
진짜 차단을 하는건지 아닌지 확인하고 카톡을 읽는지 안읽는지 확인하고 하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회사일의 스트레스와 하모니를 이루며 내 심장을 찌른다.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장난이라도 유쾌하진 않네. 잘 있어.>
라는 짧은 글을 남기고 카카오톡 방을 나가버렸다.
어제 하루는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홧김에 일을 저지른건 잠깐이지만, 후유증은 길게 남는 법이다.
소심하면 소심할수록 후유증은 더욱 크고 길게 남는다.
나는 그날 잠들기 직전까지 휴대폰을 신경 쓰면서, 혹시나 사과를 해오진 않는지 아니면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할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척 말을 걸어볼지 하면 언제 말을 걸어야할지 다음날 할지 아니면 주말에 할지 아니면 자존심이 있지 끝까지 참을지 아니면 자존심이 밥먹여주냐 지금 당장 전화하자 해야할지를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제 그만 지워보려해도 니가 너무 물들어있었다'
라는 어디선가 들어본 구절을 생각하며, 물들기전에 정리한게 낫지 않나 싶으면서도 시작할때 생각했던 이별이 이런 형태는 아니지 않았나 하는 회의감이 계속해서 나를 고민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결국. 이런 고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지극히 한심하게도 나의 백기 투항이었다.
<미안해>
카톡을 보내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저쪽이 심한 잘못을 했는데, 아니지 농담을 대번하게 받지 못한게 잘못이잖아.
만약에 농담이 아니었다면? 농담이 아니었다면 그걸로 끝이지 하는 번뇌의 번뇌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찰나, 그녀로부터 카톡이 온다.
[뭐가?]
예상했던 대답이다. 예상했던대로 차단하지 않았다. 역시 농담인 것이다.
저쪽이 태연하게 나온 이상 나도 태연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차단안했네?>
이 이후로는 그녀가 나오는 행동에 따라 대응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이전처럼 지내면 되는걸까, 마음 한켠에서 자존심도 없는 호구자식아 라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무시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답이 예상과 달랐다.
[차단? 무슨 차단?]
무슨 차단이라니? 어제 했던 말을 기억을 못하는건가 아니면 알고도 시치미를 떼는 건가?
<나를 차단한다고 했잖아>
[내가 오빠를 왜 차단해?? ㅎㅎ]
어제 그런 일을 해놓고 모르는척 하는 행동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당장이라도 어제 카톡내역을 찍어서 보내주고 싶은데, 어제 홧김에 방을 나가버려서 카톡 이력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진짜 모르는 걸까 모르는척을 하는걸까, 어떻게 사람이 어제한 행동을 까맣게 잊을 수가 있을까.
소홀한 사이에 의미 없이 주고받는 대화도 아니고 연인관계에서 한 말을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모른척 할 수가 있을까.
서로가 선을 넘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어색하고 머쓱해질까봐 모른척을 하는걸까 아니면.....
그녀가 보이는 뜻밖의 행동에 내 생각은 모든 가능성을 찾아 탐구한다. 진짜 모르고 있는 경우의 수는 건망증에서 시작해 조기 치매까지 나아가고
알면서 모르는척 하는 경우의 수는 인간 심리의 끝바닥까지 뒤집고 들어간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공상의 영역까지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다.
카톡방을 나가면 그때까지 있던 일이 없던일로 되는게 아닐까.
카톡방을 나간 그 순간, 그녀가 나와 결별한 세계 외의 평행세계가 분리되어 지금은 결별선언을 하지 않은 세계로 분리된 것이 아닐까.
그러고보면 지금까지 카카오톡을 하면서 방을 나간 적이 있긴 있었던걸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는 대화 목록을 보며 결론을 내렸다.
그런 적이 없었다.
스팸단톡 대화방에 강제초대되어 나간 경우를 제외하면 친구와의 대화중 감정이 상해 나가거나 한 경우는 없었다.
특히 1:1 대화 중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
그리고 이런 반응도 처음.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대화방을 나감으로써 어제에 있었던 일은 나만이 기억하고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세계로 되어버린게 아닐까?
그녀를 만날 때 그녀의 전화기를 통해 대화내용을 확인해 본다면 진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까지 망상의 날개를 펼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조기치매설까지만해도 선을 한참 넘은 부분이다.
어제 농담하나 받아주지 못해 선을 넘었다고 자책하던 소심이가 그런 인격모독적 상상까지 한단 말인가.
거기서 나아가 카카오톡 방을 나가면 세계선이라니 소심과 망상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뭐. 배려해주는 거겠지. 어색하지 않도록.'
이렇게 생각하며 기지개를 피고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나선다.
아마도 또 투닥거리기 전까지 집,회사,전화,집 이라는 평범한 일상의 챗바퀴를 반복하며 돌게 되겠지만 말이다.
만약 또 다툴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때 다시 대화방을 나가봐야지.
'그때도 세계가 바뀌어서 없던 일로 되어주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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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하고 대화하다 실수로 대화방을 나감.
친구가 분명 내가 안한걸 했다고 우겨서 속이 터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써봅니다.
그리고 진실을 알아버린 울프맨은 카카오톡 회사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