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404069
부산의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서거 70년을 맞이하여 광복회 부산지부가 안희제 선생의 미공개 기록을 공개.
그것은 바로 1934년. 안희제 선생의 차남 안상훈씨로.
신부는 동아일보를 창간한 만능언론인 하몽 이상협선생의 막내처제.
주례를 맡은 이는 조선어학회의 멤버이자 우리말 큰사전 집필에 큰 공을 세우신 이극로 선생.
그 옆에는 초대 문교부 장관을 맡은 안호상 선생 등 쟁쟁한 인사들이 모여 결혼식을 치루었다.
안희제 선생은 1909년부터 비밀청년단체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회복 운동에 힘써왔으며,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접선.
1914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백산상회를 건립하여 무역업에 종사하며 독립군의 자금 및 독립인사를 은닉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이후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대고 기미육영회를 창설, 많은 이들을 교육시켜 이들을 모두 독립운동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1925년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중외일보를 매입하여 중앙일보로 개편. 일본의 총독정치를 강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희제 선생님... ㅠ.ㅠ)
이후 33년까지 꾸준히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하셨고, 34년 차남의 결혼식도 치루었으나
(평소 일제의 감시를 두려워하여 사진찍을때 항상 뒤에서 찍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식 만큼은 예외로 앞에서 사진을 찍으셨다.)
일제에 의해 투옥되고 끔찍하고 잔인한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0개월 이후인 44년 병보석으로 풀려나게되었는데... 당시 기록을 보면..
[임종직전의 기록]
-백산이 위험하니 출감하라. 라는 연락받고 가보니 전신이 수척하여 목불인견이었다. 아들과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울분이 치밀어올랐다.
-병원에 도착해 우유를 드렸더니 드시고 토하기를 수차례. 새벽5시에 잠시 의식을 회복하고 이웃과 동리친척 과수원 안부까지 묻고 임종하셨다.
-별세 이틀 후 조문 핑계로 형무소 직원 둘이왔다. 일본인 직원 둘이 정중한 태도로 '안선생님은 참으로 훌륭한분이셨다' 라고 했다. 이들도 수감생활을 지켜보며 뭔가 감화를 받은 것 같았다.
-별세 후 형무소에서 입으셨던 내복을 보니 이가 너무 많아 보관할 수 없어 소각했다. 형무소의 잔인한 처사에 격분을 금할 수 없다.
백산 안희제 선생은 임종직전
-나는 비록 해방을 보지 못하지만, 너희는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느냐
-못난 애비를 만나 너희의 고생이 너무 많았다. 미안하다.
라고 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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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오늘의 저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