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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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독서 일기 (2) 2011/05/19 PM 04:27
2011.05.19 목 16:26 다이어리 내용



※ 파시즘 p.190 ~ p.269


파시즘 3장 후반부와 4장을 읽었다. 파시즘이 1차 세계대전 후 각 국가에 어떤 과정을 거쳐 뿌리를 내렸고 또한 작은 기반을 바탕으로 어떻게 권력을 획득했는가에 대한 서술이 되어 있다.


파시즘은 엄연히 태생적으로 ‘군부 독재’와는 다름이 강조되어 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로 대변되는 파시즘에 대한 인상은 대개 흑백 영상에서 볼 수 있는 군인의 ‘사열’과 ‘행진’일 것이다. 그래서 흔히 우리는 파시즘을 군부 독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위의 내용에는 파시즘은 엄연히 의회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으로 진행되어 왔고, 대중이 바라는 바를 부추겨, 그리고 대중의 적을 생산 · 확대하여 파시즘에 유리한 여론 형성에 힘을 쏟았다. 이런 점이 ‘쿠데타’로 대변되는 ‘군부독재’와 다른 점이다. 즉, 권력 획득 과정이 (군부 독재에 비해) 일반적이고 적법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이 대중 기반으로 한 권력획득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게 이채롭다. 1932년 7월 독일에서 벌어진 의회선거에서 나치당이 37.2%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독일 의회에서 제1당의 위치를 차지했으나, 1932년 11월에 치른 선거에서는 지지율이 33.1%로 하락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되어 전 독일을 지배했던 1933년 3월의 의회선거에서도 과반수에 못 미친 43.9%의 지지율에 그쳤다. 즉, 나치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독일인 2명 중 1명 이상은 나치당에 반대표를 던진 셈이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도 1921년 5월에 참가한 자유의회 선거에서 535석 중 불과 35석에 그쳤다.


하지만, 문제는 이와 같은 대중의 다수지지 획득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권력의 상층부에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다는 게 또 아이러니이다. 파시즘은 의회 교섭력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기에 그들은 의회제도 자체의 신용을 잃도록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무질서를 선동하는 것은 보수층의 지지를 잃는다고 판단하였기에 그 전 지지세력이었던, ‘돌격대’를 숙청하는 과정을 거친다. 즉, 파시즘은 행동 민중기반 세력에서 보수적 엘리트주의로 협력 대상을 바꿨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수 엘리트주의자들이 왜 파시즘과 손을 잡았느냐는 건데, 그에 대한 해답은 공산주의의 대두에 있다. 노동계급 기반인 공산주의가 기존의 지배체계를 흔드는 것에 대한 본능적 공포가 보수 세력의 악수를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즉, 기존의 엘리트층은 피지배계층의 혁명에 대비해 파시스트들과 공동의 명분, 다시 말해 볼프강 시더가 말한 헤르샤프츠콤프로미스(‘지배를 위한 타협’)로 결합했다. 결국 정치 및 경제 체제의 위기가 파시즘이 들어설 틈을 열어 주기는 했지만, 파시스트들을 실제로 그 틈 안에 밀어 넣어 준 것은 일부 강력한 기득권자들의 악수였다.


6장부터는 파시즘의 권력행사에 대한 내용이 이어진다.



ps. 아~~. 인문학으로 돌아와서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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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인    친구신청

개인적으로 소름돋는 내용이었습니다. 파시즘의 발생이 우파운동보다좌파운동에 가깝다니...

꼬라박지호    친구신청

인인인// 제가 이해한 내용과는 좀 다르네요. 공산주의 확대를 두려워한 보수계층이 파시즘과 손을 잡았다라는 내용입니다.

저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국가주의 확산을 하향식으로 고수하려한 보수파가 결국 실패함으로서, 집권세력을 유지에 목매인 그들이 결국 비슷한 기조의 대중기반의 파시즘과 결합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려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중을 기반으로한 기존 집권 체제의 전복'이라는 점에서 좌파라 볼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파시즘 뿌리내리기의 수단이라서 태생이 좌파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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