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독서 일기의 계획은 이랬다. 굳이 내용을 소개한다기보다 내가 하루에 어느 정도 읽는지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치려고 했다. 그러나 한자 두자 쓰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분수 넘치게도 책을 평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는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책에 대한 소개와 평가는 엄연히 다른 갈래임에도 어정쩡한 터울에서 버무려야하니, 능력 부족과 게으름으로 무장한 글쓴이에게는 아무래도 버거운 일임이 분명하다. 특히나 오늘 소개하는 내용과 같이 전문분야의 책들은 평하기는커녕 이해의 유무부터 따져봐야 되기 때문에 단원 축약을 할지 발췌를 할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냥 욕심을 버리고 ‘일기’라는 갈래의 타당성에 묻어 타자가는 데로 써야지 그게 답인 듯하다. 언제나 쓸데없이 서설만 길다. 시작한다.
※ 브레인 스토리(뇌는 어떻게 감정과 의식을 만들어 낼까?), 수전 그린필드, 지호, 2004.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 책의 선정은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근대 철학의 시조인 데카르트는 인식 주체의 확실한 기반(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마련했으나 주체에 대한 근거는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체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신이 인간에게 준 본유관념(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 관념)이라고 설명하고, 라이프니츠는 정신이 신체기관을 작동시키는 게 아니라 실은 신이 정신과 신체가 일치하도록 예정(예정조화설)했다고 설명했다. 칸트는 사물 본체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으며(물자체), 거기에서 한 술 더 떠 헤겔은 ‘개별 인간은 절대 정신의 파편’이라고까지 했으니……. 이 말인즉슨, 철학의 범주에서는 ‘인식’의 본질에 대해 결국 손을 놓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인식’은 어떻게 설명 가능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바로 의학에서 나온다. 그것도 ‘인식’이라는 철학 용어가 ‘의식’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쉽게 풀이되어서 말이다. 20C에 들어서 과학, 특히 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다양한 사례가 수집되고 강력한 환원주의의 메스로서 그 사례에 대한 정밀한 생물학적 분석이 적층되기 시작했다. 이런 측면에서 ‘뇌파’와 같은 ‘의식’의 순간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음에 따라 추론보다 관찰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뇌에 대해서도 현미경을 들이밀 수 있게 되었다. 앞선 독서일기에서 소개했던 ‘새러’라는 뇌종양 환자의 경우처럼, 의식자(새러)가 의식의 상태에서 의식의 근원(자신의 뇌)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브레인 스토리는 이와 같은 시대에서 뇌과학의 첨병이 어디에까지 놓여있는가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이다. 이 책은 단락에 따라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변한다.
1. 자아는 뇌의 어느 위치에 존재하는가?
2. 뇌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물질에 의해 영향 받는가?
3. 뇌는 유전으로 결정되는가? 아니면 환경에 의해 규정되어지는가?
4. 뇌는 어떻게 세상을 지각하는가?
5. 기억은 뇌에 어떤 층위로 각인되는가?
6. 인공 두뇌는 가능한 것인가?
7. 감정은 학습인가? 본유인가? 뇌에서 감정을 느끼는 부위는 어디인가?
8. 약물은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9. 뛰어난 뇌의 조건은 무엇인가?
10. 인간종의 단일 특징인 언어, 뇌는 언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11. 의식은 뇌에서 어떻게 형성되는가?
12. 뇌의 미래는? (기술은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 질문 자체가 굉장히 흥미롭지 아니한가?
계속되는 변명이지만, 책 내용을 일일이 소개하기에는 그렇고 관계는 있으나 쓸 데는 없는 이야기를 좀 해보며 둘러볼까 한다.
독서는 확실히 적층의 미학이 빛을 발휘한다. 독서 읽기를 여태껏 읽어 오신 분들이라면 기억나실는지 모르겠는데, 간호학과 후배에게 ‘생리학’ 책을 빌린 적이 있다. 그 첫부분이 생화학 내용으로 그 중에서 살짝 기억에 남는 게 ‘이온’에 대한 설명이었다. 대략적으로 소개한다면 이온이란, 일상적인 원자의 전자수에 비해 하나 적거나 많아서 전하(전기)를 띠는 원자 또는 분자를 말한다. 이는 이온이 방향성을 지닌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다. 여기에 관련한 화학식을 보다 바로 덮은 기억이 생생한데, 그 때는 이온이 생리학 첫 장에 나오는 이유를 전혀 몰랐다. 그런데, 요번 ‘브레인 스토리’를 읽다가 이유에 대해 어설프게나마 알 수 있었다.
신경은 뉴런을 통해서 전달되는데 뉴런과 뉴런 사이에는 ‘시넵스’라는 골(분절)이 있다. 이 시넵스를 통과하기 위해서 인체는 두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첫째는 골과 골 사이를 헤엄칠 수 있게 하는 화학적 방법: 뉴런은 수상돌기와 축색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전달은 축색에서 나와 수상돌기로 향한다. 이때 동원되는 전달물질이 ‘호르몬’이다. 둘째는 뉴런 내의 전기적 신호: 즉, 수상돌기로 들어온 내용이 뉴런 내에서 전달되어 축색으로 빠져나가기 전까지 동원되는 매질이 바로 전량을 가진 ‘이온’이었던 것이다. 이러니 생리학 도입부터 ‘이온’으로 잔뜩 치장될 수밖에……. 본인의 무식에 할 말을 잃었다.
또한 후쿠오카 신이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서 나온 내용도 상기가 되었다. 신경의 전달에 대해 ‘가’라는 내용이 A-B-C 단계로 이어진다고 할 때 'B'라는 단계가 없어지면 전달이 멈출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신경은 굉장히 유동적으로 구성되어 'B'단계 없어진다 하더라도, ‘A-D-E-F-C’ 등의 우회로를 만들어 결국 ‘C’로 전달케 한다. 이와 같은 탄력성을 후쿠오카 신이치는 ‘동적 평형’이라 개념 안에 넣는다.(단, ‘가’의 구성 자체에서 문제가 생기면 모두 엉킨다.) 이와 같은 내용이 ‘브레인 스토리’에서는 시각 장애인의 예로 설명된다. 시각의 구성은 ‘움직임’을 지각하는 신경과 ‘형태, 색’을 지각하는 신경이 따로 존재하는데, 하나가 이상이 생기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만 아예 기능 자체가 완전히 소실되는 것은 아니다. 어렴풋이나마(미세한 할지라도) 인지가 가능함이 관찰되는데, 이는 정규적인 신경계가 분절된다 하더라도 그전까지 그 기능을 하지 않았던 다른 통로가 어설프게나마 우회 가능케 하여 보충한다는 뜻이다.
주욱 읽어 오던 분야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접해본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한발 딛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디를 둘러 봐도 ‘경이’라고 밖에…. 두달 전에 네트워크 과학을 알게 해주었던 ‘링크’ 이후로 이처럼 지적충격을 주었던 책은 이게 처음이다. 낱장마다 새로움이 가득 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내가 여태까지 무지했다는 말이지;;) 순식간에 다 읽었다. 독서를 하는 사람은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독서를 함으로써 새삼 깨닫는 것은, 독서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모르고 있느냐?’를 의식화 해준다는 진리이다.
철학에서 품었던 의문이 많이 풀렸다. ‘링크’와 더불어 별 다섯 개에 다섯 개 주겠다.
Ps. 번역도 잘되어 있고, 애당초 원 영어 문장 자체가 방송용으로 기획되어서 그런지 깔끔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