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저리를 안 붙이겠습니다. 나름 소회가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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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치고 정치, 김어준, 푸른 숲, 2011.
김어준이 책을 냈다. 씨바. 기쁘다. 장안의 화제라는 구태의연한 수식어가 그대로 붙은 ‘나꼼수’의 기획자가 책을 낸 것이다. 흥미 돋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첫 페이지 열어 보니, 얼레? 무학(無學)의 통찰이란다. 삶으로 체화된 지혜라고 한다. 아니 68년생. 44세에 불과한 총수가 통섭에 의한 통찰을 말한다니……. 예순 된 우리 아버지가 친구 분 주례하는 걸 보고 ‘귀때기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주례 본다.’고 흉 아닌 흉을 보았는데, 40대 중반의 창창한 우리 어준이형은 어떤 삶을 살았길래 ‘무학(無學)의 통찰’이라는 광오발랄한 말을 서슴없이 할까? 궁금하다.
휘리릭~. (이 행간에는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 있다.)
퇴근길, 걸으면서 책을 읽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치는 그랬구나. 그랬구나.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구제하며 보듬고 살피는 게 정치였구나. 심연에 끝도 없이 가라앉은 자신을 구태여 끄집어내어 자기기만 · 자기합리화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천착(舛錯)한 자신을 살핀 후, 실체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 다른 이에게 연민을 지니며 비로소 ‘함께 살자’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정치였다. 정치인 스스로가 자연인과 정치인을 구분하는 이정표가 되는 게 이 필연적 자기반성이지 않을까. 자신의 욕망을 대의라 착각하지 않고(여기서 대부분 Out!) 변화의 원동이 자신의 욕망임을 인정하고, 이 욕망을 정제하여 공동체 구성원들의 ‘욕구’와 결합시켜 다수의 행동의지로 빗어내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중요한 점. ‘욕망’을 인정하라.
‘닥치고 정치’는 여기서 출발한다. 대중의 ‘욕망’을 해소시키려면 어떤 ‘도구’를 써야하는가? 기존 정치 평론가들이 강조하는(혹은 그들이 강요받는) 논리적 명정함, 수미일관, 대중 행동의 방향 제시는 쌈이나 싸먹으라 그런다. 사람은 결국 감성으로 움직이며 이성은 감성의 행동을 설명할 변명의 포장지로 쓰인다고 말한다. 그 포장지가 아무리 삐까뻔쩍해도 일반 사람들은 거기에 속을 만큼 어리석지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사람은 그냥 사람. 그러면 무엇이 사람의 감성이라는 ‘본능’을 움직이느냐? 아니면 그런 저층의 본능은 어떤 ‘정치인’을 도구로 선택할까?
김어준은 그 물음에 세 가지로 답한다. 첫째는 앞서 말한 본능적 감성, 둘째는 개개인의 감성이 개별 육화(肉化)되게끔 하는 경험, 셋째는 그런 경험이 몸에 배여 나올 때 발휘되는 태도 즉, 에띠튜드(attitude). ‘닥치고 정치’가 각기 다른 소재와 풀이로 세분된 구성을 지녔지만 본질적 관점은 결국 이 셋이라 본다. 조국 현상에 대한 논의, BBK, 삼성 에버랜드 불법증여, 천안함, 진보 · 보수를 망라한 대표적 정치인의 인물평 그리고 한국정치의 나아갈 방향. 총수는 이 잡다하고 세밀한, 돋보기 아니 현미경으로 봐도 관찰하기 어려운 이 개별 사안에 떡하니 망원경을 들이댄다. 그리고 씨익~ 쪼갠다. ‘니들은 지금 방법이 글러먹었어 씨바!’
이 책의 근본적 매력은 위와 같은 서술자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물론 책의 기술적인 평가로, 논지의 명확함, 정명한 자료의 제시, 일상적인 언어로의 풀이 등은 높게 쳐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좋은 책들의 범주에 ‘닥치고 정치’를 슬그머니 포함시키기에는 뭔가 미진하다. 본질은 저자에 있다. 책은 출판 이후에 온전히 독자의 몫이라지만, 이 책은 그게 아니다. 밑도 끝도 없는 당당함. 광오 발랄한 선지적 선언, 자기대면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부끄러운 유아독존 가득한 자뻑(;;). 김어준이 그토록 강조했던 태도, 김어준이 살아온 삶이 이 책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 땅의 서민에게는 이 책의 발간 자체가 위로가 된다.
한국 정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피부로 느끼는 당신! 사라.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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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책을 이렇게 아예 두리 뭉실하게 소개할 수는 없고, 인상적인 부분 두 가지 정도만 발췌·요약 하겠다.
첫 번째, 좌파·우파에 대한 사바나로의 회귀.
좌·우란 개념은 태초에 ‘이념’이 아니다. 즉,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전에 본능이라는 진화심리학적인 시각. 우를 움직이는 것은 정글 속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 그 공포를 무릅쓰고 획득되는 자원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 능력의 판단. 그리고 그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 · 자존심. 좌를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정글의 공포를 구조로 생각하는 시각, 공포를 구조화시켜 분할시키겠다는 판단. 그래서 구조화된 분할을 위한 ‘혁명’에의 행동의지. 보편적 평등에 대한 고찰. 마지막으로 복지, 정서적 안정을 위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공동으로 보장해주려는 사회적 염치. 짧게 줄여서 뭔 말인지 모르겠다면, 사든가 빌리든가 봐서 이해 아니 느껴보라. 이상!
두 번째, 내가 본질을 깨닫고 치유된 계기. 노무현 상실에 대한 김어준의 소고.
인간을 연민하게끔 프로세스(본능화)된 기질적 진보성을 지닌 사람들이 노무현을 잃고 울었다. 울어야 옳다는 게 아니라, 단지 감수성이 다르다는 말이다. 노무현은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옳다고 배운 모호한 정의에 대한 감각, 우리 편은 이기고 나쁜 놈은 진다는 수준의 정의에 대한 감각,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반드시 그렇진 않다는 걸 어쩔 수 없이 경험으로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그런 게 있다고 믿고 싶은 그 정의에 대한 원형질에 가까운 감각이, 사람으로 체화된 상징이야. 그래서 노무현의 죽음은, 아직도 내안 어딘가에서 살아 있던, 그런 단순한 정의를 믿었던 어린아이의 동반 죽음이야. 내 안의 어린아이가 죽은 거라고.
특히 두 번째 단락, 나는 집으로 돌아가며 이 부분을 읽었다. 콧망울이 찡하고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다 큰 어른이 길바닥에서 울 수는 없기에 꾹꾹 참고 걸었는데, 무엇인가가 아른거렸다. 그랬다. 내가 노무현이 죽고 나서 막연히. 정체모를 상실감에 시달리며 술을 퍼먹은 그 날의 기억. 바로 이 문단을 읽고 내가 그 때 왜 그렇게 슬퍼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치유는 약으로서 하는 게 아니다. 상처 그대로를 보고 받아 들이는 것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나는 치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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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근시일 내에, 김어준 Vs 진중권 (진중권을 위한 어쭙잖은 변호)이라는 가제로 짧은 글을 써볼까 합니다.
Ps2. 오리지날팬티, 다재무능 님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