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 미국사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미 제국주의 역사, 하워드 진, 다른, 2008.
미국인이 보는 미제국주의의 역사. 여기까지만 적어도 제가 ‘빨강빨강’ 열매를 먹은 ‘빨갱이’같네요. 결국 미국인 스스로가 보는 반성적 자기대면. 이게 요번 책의 중점내용입니다. 미국이라는 용광로의 탄생과 성장에서 어느 집단이 권력을 잡고 휘둘렀으며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허울 좋은 플랑을 날리며 어떤 사회적 약자를 희생시켰느냐, 그리고 그 약자가 어떻게 자기 권리를 획득하고자 했고 실패하였는가에 대한 소개입니다. 부제를 붙인다면, ‘세계인 먹이로 삼은 미국인 잔혹사’ 정도가 되겠습니다. 다를 정리할 수는 없고 종교적·경제적·정치적 측면의 중점 부분만 요약해서 말씀 드릴까 합니다.
이 책은 1890년 ‘운디나드 학살’로 시작합니다. 운디나드 학살이란 앵글로-색슨으로 이루어진 백인이 서부개척이라는 명분으로 토착민이었던 인디언을 ‘처분’한 사건입니다. 왜 이게 중요하냐면, 개신교 특유의 선민사상이 정치적으로 결합된 미국적 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의 영적 형식이었던 교령춤(고스트 댄스)을 백인 개척민을 두렵게 만드는 야만적 행위라고 낙인찍고, ‘그들이 미쳐버렸다. 우리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300여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로서 종교적 도그마의 실천 강령이 탄생했고, 이게 아들 부시까지 이어져와 ‘신은 우리를 보호한다.’는 식의 자기기만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게 되는 토양을 낳게 됩니다.
두 번째로, 미국 초기 악덕 자본가들의 자본 독점입니다. 이들은 유럽의 제국주의를 모방하고 경쟁하면서 노동자를 자본으로 옭아맵니다. ‘J. P. 모간, 존 D. 록펠러, 제이 굴드’가 대표적이며, 이 와중에 일어난 ‘풀먼 파업’은 몇몇 거대자본이 주도한 왜곡된 자본주의가 어떤 참혹한 결과를 낳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이콘이 됩니다. 조지 풀먼이라는 악덕주는 이어지는 노동자의 불만을 ‘격리와 생계’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시카고 외곽에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 풀먼 시티를 세움으로써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주택에 높은 임대료를 부과하여 노동자들의 생활을 통제했습니다. 즉, 임금을 주고 그걸 다시 집세로 받는 형식입니다. 집세뿐만 아니라 생필품도 유통 마진으로 착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풀먼은 노동자들을 ‘내 자식들’이라 불렀는데 바로 이게 백인판 인디언 보호구역 시스템이었습니다. 여기에 반기를 든 인물이 미국 철도 노동조합(ARU)의 젊은 지도자 ‘유진 빅터 뎁스’였습니다. 그러나, 언론 조합은 그를 독재자 뎁스 혹은 킹뎁스라 묘사하며 뎁스의 반란이라 딱지 붙였습니다. 그리고 뎁스는 법원의 파업금지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여기서 자본과 합작한 미정부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이 탄생되었습니다. 미 정부는 미국철도노동조합과 풀먼사의 파업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어도, 1893년에 시작된 경제 불황을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미국 산업의 주도자 역이었던 기업가들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고, 해외에서의 군사적 모험이 미국내의 파업과 저항운동의 반항적 에너지를 외부로 향해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애국주의는 모든 계층의 불만을 잠재우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반공’이죠.
1823년에 선언된 먼로주의는, 위에서 설명한 ‘내우를 외환’으로 타개하려고 했던, 미국의 정책적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먼로주의를, ‘유럽 열강으로 하여금 더 이상 미 대륙을 식민지화 하거나 미국이나 멕시코 등 미 대륙에 있는 주권 국가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피압자의 독립선언이라고 배웠습니다만,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경제적 팽창주의와 군사적 팽창주의를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미국은 19세기 후반까지 수많은 해외 침공과 개입의 경험을 갖게 되었고 팽창주의가 미국 정치의 중심적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이라크 전쟁도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클린턴 시절의 고유가를 비판하며 등장한 부시가 클린턴 시절의 4배에 달하는 오일 쇼크를 맞게 되자 정권에 대한 비판을 돌리고자 전쟁을 감행한 것이고, 결국 위와 같은 맥락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미국은 정치의 마지막 수단이라는 ‘전쟁’을 정치적 목적으로 자의적으로 가공했습니다. 1945년 가을 패전한 일본은 2차 대전의 시작과 함께 점령했던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로부터 철수하였습니다. 1년 후 프랑스는 베트민(식민통치 종식과 베트남 독립 달성을 목표로 호치민이 이끄는 혁명운동세력)과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1950년의 국가안전보장회의 비망록에 나타난 것처럼 도미노이론이 주장되었습니다. 도미노이론이란 일렬로 세워진 도미노처럼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바로 옆의 나라도 공산화되고 이가 반복된다는 이론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며 프랑스 총 전비의 80%를 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1953년 의회 문서에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문서에서는 “인도차이나 지역은 쌀, 고무, 철광석이 엄청나게 풍부하다. 이 지역의 위치는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열쇠가 될 만큼 중요하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두 초강대국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과 혁명군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였고(리영희 평전 참조), 1954년에 프랑스가 전쟁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1차 베트남 전쟁) 제네바 회담으로 베트남은 둘로 나누어지고 남쪽은 프란스가 통치하고 북쪽은 베트민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또 2년 내에 베트남을 통일하고 베트남 국민 스스로 정부를 선택하는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1955년 베트남 통일을 반대하고 전 베트남 관리 ‘응오 딘 디엠’이 이끄는 괴뢰독재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미국방부 문서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남 베트남은 본래 미국의 창조물”이었다.
1964년에 통킹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미 정부가 북 베트남 해안의 통킹만에서 "북 베트남이 미해군 함대에 의도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했다.“라고 주장한 사건입니다. 통킹만 사건 후 즉시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시작했습니다.(2차 베트남 전쟁) 이에 대한 진실은 2005년 말에 밝혀졌습니다. 미국은 북베트탐이 통킹만에서 미 전함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정보가 고의로 조작되었거나 은폐되었다고 연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서도 똑같은 패턴을 따랐습니다. 2005년 5월 1일 런던의 선데이타임지는 영국정보부장이 보고한 비밀회의 기록인 ‘다우닝가 메모’를 게재했습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부시는 테러리즘과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군사행동을 정당화한 후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길 원했다.’
이 밖에도 미제국주의 사례는 많습니다. 쿠바나 이란의 내정간섭도 동일한 궤도에서 체계적으로 이루어낸 자국 자본가와 정권 유지를 위한 ‘이벤트’이자 ‘상품’이었던 셈이죠. 그럼 이렇게 역사적으로 조물된 억압의 테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워드 진은 미국인에게 이렇게 고합니다. 그리고 이 고함은 현재 한미 FTA를 날치기 당한 우리에게도 유효한 대답일 수 있겠습니다.
[ 어려울 때 희망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낭만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잔인함의 역사만이 아니라 열정과 희생, 용기와 관용의 역사라는 사실을 믿는 태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훌륭하게 처신해온 경우가 아주 많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행동할 힘을 얻을 것입니다. 희망은 변화를 위한 에너지입니다. 미래는 무한한 현재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최악의 상황과 싸우면서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로서 놀라운 ‘승리’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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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된 게 이 달의 이 책은 딱 타이밍 맞게 샀습니다. 한·미 FTA. 그것도 날치기라니, 뭐라도 한마디 부르짖고 싶지만, 한낱 ‘말 한마디’ 이전에 목구멍 안에서 비명과 욕지기가 절로 섞여 울분으로 빗어지고 있네요. 살아가며 가끔 분노로도 취할 때도 있는 법. 그게 바로 지금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는 마냥 막막합니다. 우석훈 박사가 ‘한국의 정치인은 길바닥에서 태어난다. 지금 우리와 함께 서있는 자. 그가 바로 지도자다.’라고 하셨는데, 그런 수식은 물론 ‘독려’의 뜻이긴 합니다만 오히려 공동체의 수동성을 지적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에는 행동할 수 있는 사람과 행동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분명히 나뉩니다. 선택은 인간의 본성으로 ‘분노’냐, ‘두려움’이냐의 감정 중 무엇이 우선하느냐에 달린 일입니다. 이를 도덕적 의무감으로 치환하여 ‘선·악’으로 몰고 가면 그것이야 말로 흔히 말하는 ‘식자(識者)의 오만’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한 번의 큰 규합된 행동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집단과 정서적 동질감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행동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식 단정은 오히려 반발만 나을 뿐입니다. ‘그래. 네가 움직이지 않으니 나라도 움직일게.’등의 정서적 부채를 안기는 방법이 옳다고 봅니다. 그래서 딱 두 번만, 총선과 대선에서 ‘마음으로 다가 올 수 있게’ 그 딱 두 번만 함께 해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한 명의 백 걸음이 아니라 백 명의 한 걸음.’ 저는 그게 최선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80년대 그토록 힘들게 쟁취했던 절차적 민주주의. 요번엔 이걸 무기로 삼아 봅시다.
Ps. 정리의 모자람을 다시금 다친 손으로 핑계 대어 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므리타,숑숑바잉, 리박사님 댓글 감사합니다. _(_.,_)_ 참. 그리고 요즘 갑자기 친구 추가 신청하시는 분 많으신데...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단 하나 부탁이 있다면, 박명록에 한자 쯤 적어주시고 친추 신청해주시면.... ㅡㅡ;; 흑... 저도 방명록이 쓰이는 걸 보고 싶어요~~.
그럼 저 책은 만화로 되 있는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