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웅진지식하우스, 2010.
여러 가지 의미로 흥미로운 책입니다. 우선 번역. 번역자 나와. 최근 잡스 전기로 시발된 번역자들의 왈가왈부가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유례없는 번역 배틀이 벌어지기도 했죠. (다음 아고라에서 ‘나는 번역가다.’로 검색) ‘직역이냐, 의역이냐’ 라는 번역의 잣대에 대한 가치관에 대한 논쟁이라든가, ‘번역이냐, 번안이냐’로 번역가에 대한 비아냥까지 이어졌습니다. 나름 관심을 보고 지켜봤는데요, 어떤 과점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번역에 있어 정밀한 단어 선택으로 의미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쪽보다, 다소 의역이 있더라도 읽기와 이해의 용이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 듯 보입니다. 결국 균형이 문제이긴 합니다. 제 지인이 이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초판이 완벽하면, 재판, 삼판은 어떻게 팔런가?’
대개 인문학의 책은 잘된 번역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 일단 역자 자체가 다방면에서 상당한 전문 지식을 지녀야 되고, 그걸 비유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문장력과 문체의 경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힘 또한 있어야 됩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특히나 사회과학 분야 저자들은 주요 용어를 자의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어 이에 맞는 어구를 찾기가 더더욱 힘들죠. 이 책에서는 ‘반동자’라는 단어를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반동자’는 통상적인 의미라기보다, “구체제(舊體制)를 부활하기 위하여 취하는 정치적 행동자”를 지칭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지 싶습니다. 맥락으로 보면 ‘앙시앵레짐’ 정도가 되겠는데, ‘반동자’라는 딱딱한 어휘보다 ‘구체제 신봉자’ 정도로 의역해 받아들이면 괜찮겠네요. (그렇지만 이렇게는 번역할 수 없는 노릇인 게 구체제 신봉자라 써버리면, 표현 자체가 프랑스 혁명과 연관성이 짙어 시대적 보편성을 지니기 힘들다는 약점을 지니게 됩니다. 이해가 쉽더라도 말이죠;;)
그러나, 이와 같은 몇 가지 난제를 너그럽게 감안하더라도 이 책을 곱게 봐주지는 못하겠습니다. 문장 수식이 산만할 뿐만 아니라, 절대 한국어 문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 역으로, 개혁가들이 사실은 교활한 이기주의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폭로’하는 무용론 주장자들은 종종 개혁가들이 ‘선의’를 지녔지만 엄청나게 순진하다고 꾸짖곤 한다. ]
[ 이와 대조적으로, 무용론 주장자들은 개혁가들이 사실은 교활한 이기주의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폭로’하기도 하고, 대개 개혁가들이 추진하는 정책 대부분들이 비록 선의에서 비롯되기는 하나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 꾸짖기도 한다. ]
위는 책의 내용이고 아래는 제가 의미전달이 쉽게 몇 단어를 넣어 본 문장입니다. 딱 봐도 원문에는 없는 몇 개의 단어가 임의로 들어갔습니다. (임의이긴 하나 앞선 단락에서 언급되고 유추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비록 번역자가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 원전 그대로의 뉘앙스로 번역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의 문투가 단락 내 몇 개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개인적으로는 읽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웬만한 독자이니까요.
그러나, 독서의 불편으로 이 책을 외면하기에는 참 아까운 책입니다. 보수에 대한 참 많은 분석 중, 보수의 수사법만 분석한 책은 찾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것도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그 수사를 행한 지식인 그리고 그에 비롯된 여론이 어떤 현상을 불러왔는가에 대해 함께 설명한 책도 크게 많지는 않지 싶습니다.
앨버트 O. 허시먼은 영국의 사회학자 토머스 마셜의 시대 구분을 차용하여 점진적 진보에 따른 반동의 경향성을 구분합니다. 마셜은 시민권의 확대를 시민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 그리고 사회적 차원으로 구분하고 보다 발전한 사회가 어떻게 이런 시민권은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갔는지 설명했습니다. 18세기는 언론·사상·종교의 자유에서 시작해 공평한 정의와 개인적 자유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권리, 즉, 자연법사상과 미국 독립전쟁 및 프랑스 혁명에서 주창된 ‘인권’을 포함하는 시민적 시민권을 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19세기에는 시민권의 정치적 측면이 상당히 발전함으로써 투표권이 더 큰 집단으로 확대된 시기. 20세기에는 복지국가론이 등장하며 시민권의 개념이 사회적 · 경제적 영역까지 넓어진 시기로 규정합니다. 쉽게 말해, 18세기에는 시민권의 등장(신민의 시민화), 19세기에는 시민권의 확대(보통선거권), 20세기는 시민권의 보장(시민이 바른 투표를 할 수 있게 제반여건을 국가가 보장, 복지국가론)이 각 시대 진보가 목표한 대상이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발전 과정에서 ‘반동자’들은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구체제를 옹호하는 반동자들의 세 가지 수사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역효과 명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2. 무용 명제: “그래 봐야 기존의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3. 위험 명제: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어떤 정책을 취하면 그에 생각지도 못한 역효과가 일어난다(이른바 풍선효과). 문명의 생산 구조 자체를 뒤엎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들 금권 지배가 관료제 지배로 변할 뿐, 인류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기에 지배 · 피지배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본성의 불변). 그리고 변화는 기존 가치를 필연적으로 위협한다(변화의 매몰비용).’ 는 식이죠. 이 세 가지 수사법은 결국 변화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공포를 자극합니다. 반면 그 공포를 무릎 쓸 수 있게 하는 진보적 성과의 반대급부는 일반 대중이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쉽게 가시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드뭅니다. 그렇기에 일상생활에서 정치에 크게 관심 없는 사람들의 논리 자체도 본질적인 의미에서 위의 3가지 수사법과 크게 다르지 않죠.
“네가 혼자 한들 뭐가 변하겠느냐? - 무용론”
“기껏 정부가 좋은 정책 해봤자 결국 시장에서 민감한 몇몇만 먹고 나머지는 찌끄레기 주워먹는 판국에……. -역효과 명제”
“그거 하면, 대한민국의 가치가 무너진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위험명제”
그렇다면, 진보는 위와 같은 진부한 그러나 강력한 논법을 어떻게 파헤치면 될까요. 책의 끝부분 ‘진보의 레토릭’이란 단락에서 도식화되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반동: 계획된 행동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역효과)
진보: 계획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위험박두 - 안하면 더 터진다.)
반동: 계획은 행동은 사회 질서의 항구적이고 구조적인 성격(법칙)을 바꾸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은 전혀 효과가 없고 무용하다. (불변 무용론)
진보: 계획된 행동은 이미 ‘굴러가고 있는’ 강력한 역사의 힘에 의해 뒷받침된다. 거기에 맞서는 것은 아주 쓸데없는 짓이다. (법칙적인 전진운동 - 이미 달리는 기차에 올라탔다.)
반동: 새로운 개혁은 옛 개혁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위험론)
진보: 신-구의 개혁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켜 줄 것이다. (신구조화론)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반동과 진보 모두 상대적으로 대립된 진술로서 서로의 목을 조여 왔다는 간단한 진실입니다. 반동주의자 진보주의자 모두 애당초 비타협적 레토릭을 구사했다는 거지요. 이를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두 개의 똑같은 불합리(deux impertinences égales)'라는 겁니다. 그리고 과연 이런 양보할 수 없는 충돌이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부합되느냐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 부분을 따옵니다.
[ 최근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에서 두 가지 귀중한 통찰이 나왔다. 하나는 다원적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정치 제도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위한 긴 안목의 조건에 관한 이론인 것이다. 현대의 다원적 정치 제도는 일반적으로 ‘기본 가치’에 관한 어떤 미리 존재하는 폭넓은 합의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서로 으르렁거려 온 여러 집단들이 어느 쪽도 패권을 차지할 수 없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임이 점차 인정되고 있다. 다원주의를 허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치열하게 싸워온 적대 집단 사이의 균형에서 나오는 것이다. ]
현재 한국의 정치적 파탄을 시간의 부재로 치환해 설명하는 논법이 위와 유사하지요. 흔히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라는 서유럽이 300년 동안 싸워 온 것을 한국은 겨우 20년(6.29 선언이후 기준)의 짧은 시간 동안 싸우려고 하니 더 급박하고 투쟁적으로 보이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양 쪽 다 몰살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한국 진보로서는 억울한 이야기;;) 창끝의 마지노선을 설정 못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근래 10년의 한국 정치사는, 그리고 앞으로 5년 정도의 미래 또한 격량의 소용돌이에 있을 게 분명합니다. 전 대통령이 정치적 타살로 삶을 마감 짓게 만든 ‘극적’ 요소가, 다른 극점에서도 이루어질 확률은 이미 예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역사적 비장미가 복리로 쌓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니까요.
그러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이렇게 굴러간다면, 참여자이자 방관자 혹은 관찰자인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명시하진 않았지만 간단합니다. 건전한 민주주의라는 긴 안목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싸움 자체임을 부정하지 말고 거기까지의 길이 위험스럽고 고통스럽다는 걸 인정하자는 겁니다. 정치가 '바보극'임을 알 때 진정으로 진흙탕 싸움을 비웃을 수도 있고, 그 와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지 않나 싶네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당장 읽을 때는 머리 속에서 대충 정리가 되었는데, 쓸 때는 갈팡질팡 하네요. 이건 제가 이해를 제대로 못했다는 증거지 싶습니다.;; 그리고 가끔 받는 질문인데요, '게시한 게시물 왜 재탕하나?' 보통 독서일기 작성하는데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이걸 한 번 쓰기에는 스스로 아까운 면이 많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_.,_)_
더러워?, 그것이실제로일어났습니다.,kclamp, *스피노자*, 체인지맨님 댓글 달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두껍지도 않은데 진도가 나가질 않아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