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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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go, 1991. (0) 2012/04/13 AM 11:33


마이피에서 영화 포스팅은 처음인듯 합니다. 애당초 제 글쓰기의 시작이 영화감상문이라고 기억되는데, 대개 20대 초반에 쓴 글이라 양과 질이 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문장도 좀 어설프고요. 젊음의 패기라고 할까, 이 때쯤 쓴 글은 하나같이 단정적 어조인 것은 제가 글쓰기에 갓 재미를 붙였기 때문입니다. 글로서 무엇인가를 재단하고 평가하면서 자의식을 고취시키는, 전형적인 중2병이었다고나 할까요. ^^;; 제가 철이 아직도 덜 들었기 때문에 중2병도 좀 늦게 온 셈입니다. (절 잘 아는 후배는 '꼬라박지호 선배는 철들면 아마 죽을 거예요.' 라고 심지어 깔깔대며 말하더군요;; 이것이!!) 여튼, 그 때 쓴 글 중에 그나마 정돈이 된 글을 조심스래 올려봅니다. 동성애를 소재로 다룬 영화니, 유게이 형님들께서 나름 좋아하시지 않을까.. 쿨럭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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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go, 1991)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go, 1991)는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영화이다. 그러나 사실 영화를 관람함에 있어 굳이 내용의 이해에 중점을 두고 감상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런 식의 독립영화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더 용이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생각거리를 만들어 보는 것은 감독이 의도한 ‘사고’를 이해하는데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즉 수용자가 작가(감독)의 생각을 어떻게 변형시켜 재해석하는지 고찰하는 차원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영화가 진행되는 기본 축을 ‘상실’과 그에 따른 ‘반작용’이라 정의 내리고 싶다. 그리고 이 동일한 잣대에 대해 서로 다른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중심인물들의 원인을 분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소해나가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두 주인공 ‘마이크’와 ‘스캇’은 거리의 부랑자이자 남창이다. 둘은 동성애와 우정의 사이에서 기묘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둘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스캇은 동성애를 ‘벌이를 위한 수단’만으로 한정 짓는 것에 반해 마이크는 사랑에 있어 대상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는 대상이 중요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그들이 방황하게 된 원인에 기인한다. 스캇의 방황은 자발적이고 한시적이자 유희적인 성격이 강하다. 영화 스토리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반감, 즉 부성애 혹은 가족애에 대한 ‘상실감’이 그의 방황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냉혈한에다 권력지상주의자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서 그는 일종의 ‘일탈행위’의 수단으로 동성애를 선택한 것이다. 스캇은 기존의 위선적인 모든 ‘질서’에 대해 반기를 들지만 스캇 자신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이는 그가 행해왔던 ‘유희’에 대한 생각이 결국 ‘사회가 용인하는 일종의 테두리 안에서 묵인되어지는 치기어린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보수적 시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스캇에게 있어 밑바닥 삶에 대한 시각은 마치 영화를 즐기는 관객의 입장과 별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크는 달랐다. 그에게 있어 방황은 살아가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악조건의 일상에서 마이크는 정(情)을 원했고 사람을 원했다. 그에게 사랑은 정의내릴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원인은 어릴 적 헤어진 어머니를 그리워함에서 찾을 수 있다. 마치 ‘햄릿’의 그것과 닮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마이크의 이중적인 시각은 단순히 그리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언뜻 언뜻 보이는 회상 속에서 그는 어머니의 집을 ‘파랑 그리고 녹색의 집’이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8m 카메라’ 속에서 실제로 보이는 그녀의 집은 붉은 색 지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추억 속의 괴리를 볼 때 그가 바라는 어머니는 실체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이 상상 속에서 어렴풋이 바라던 일반적이고 긍정적인 어머니 상(像)일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매번 등장하는 빈 오두막은 마이크가 지니고 있는 기억에 대한 ‘상징’이고 결국 어머니를 찾는 여행은 자신의 기억을 소급하는 과정인 셈이 된다.


기면 발작증은 앞서 말한 괴리감에서 마이크가 가지는 죄책감을 무마시키는 장치가 된다. 박살나는 집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기억은 그가 바라는 바로 ‘어긋나’ 있고 연어가 강을 오르듯 실제의 기억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그의 추억은 박살이 난다. 이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가져오고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각 자체를 강제로 ‘꺼’ 버리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마이크는 추억에서 어긋나는 모든 것,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 ‘집의 굴뚝 혹은 모양새’ 등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껴 긴장하게 되고 여기서 파생되는 ‘긴장’의 다양한 모습을 접할 때 마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고를 끊어 버린다.


위에서 정리한 바로 생각해 볼 때 마이크의 방황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이크는 끝까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그는 인생이 추억만을 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길의 감식자란 결국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이크는 더 이상 감식자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이다. 영화의 결론에서 마이크는 결코 길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쏟아져 내리는 졸음은 이제 도피가 아닌 새로운 길을 향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이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다. 인생에서 누워있는 마이크의 신발을 벗기고 짐을 빼앗는 ‘도둑’이 있을 수도 있고 도우려는 선의에 ‘여행자’도 있을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에 앞서 올라가는 ‘Have a nice day' 라는 자막은 마이크와 같은 우리네 인생을 위한 감독의 응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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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예술 영화의 포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기 때문에 절대 잠올 때 보시면 안됩니다. 나름 감상하신다고 생각하시면서, 보시면 원츄!! 불멸의 하이랜더. 키아누 리부스 형님의 파릇파릇할 때를 보시게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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