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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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독서일기. 편하게 훑어 볼 수 있는 철학 에세이. (3) 2013/04/10 PM 09:20

※ 철학 에세이- 개정4판, 조성오, 동녘, 2005. 초판출간 1983년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노동자의 화재'로 빗댄 유물론적 사고 방식에 대한 옹호였습니다. 잣대 없는 주관주의나 '가치'에 대한 염세적 시각이 지대한 상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연장이라 볼 수 있기는 합니다만, 책 속의 일화는 뭔가 어긋나 보입니다. 특히나 이 일화로 관념론과 유물론의 차이를 풀어내기엔 무리가 있죠. 일화를 간략히 소개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사 대립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한 어느 노동 조합의 이야기 입니다. 한층 격렬해진 대립 속에서 일화의 주인공인 M군은 사측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화재 사고를 겪게 되죠. 노조의 조합원들은 고민 끝에 측은지심의 연장선에서 M군을 위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은이는 이러한 노조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 M군의 배신(관념)을 비난하기 이전에 M군 또한 같은 노동자라는 존재론적 사실(유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근간은 기본적으로 노동자가 노동력을 파는 존재라는 것,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존재라는 것, 자기가 생산한 가치 중 일부만을 가져가는 존재라는 데서 출발한다. (이 계급적 동류 의식으로 볼 때), 앞서 노동 조합의 노동자들이 자기들을 배신한 노동자를 찾아가 위문한 행동이 올바르다는 걸 알 수 있다. ]


읽으시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게 느껴지십니까? ^^ 사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설명의 용의를 위해 명백한 실수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풀이한다면, 존재(실존)와 관념(이성)을 같은 층위에서 놓고 본 거죠. 그것도 모호한 기준으로 섞으면서요. 철학자로 빗댄다면,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함께 묶은 거라고나 할까요? 이는 얼치기 철학 애호가인 제 시각에서도 엄연히 잘못이라 생각됩니다. 딱딱하지만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니 좀 늘어 보겠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라 불리는 16~17세기는 인간 이상에 대해 유례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시기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걸 정리하고 분류해 기록해보겠다는, 백과사전 편찬을 시대적 과업으로 삼을 만큼 열의가 넘쳤을 때죠. 특히나 나침반, 화약, 인쇄술의 발전 및 대중화로 지적 자극 및 지식 적층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할 때였습니다. 대표적 철학자로는 과학적 연구 방법론에 환원주의라는 메스를 선물한 데카르트, 인간 자체를 또한 이성적 분자로 치환시킬 수 있다는 라이프니츠,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으로 이성을 인간의 절대적 잣대로 격상시킨 칸트를 들 수 있습니다. 이성에 대한 단호한 믿음과 신뢰가 충만했을 때며 관념론의 전성기라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이에 뒤따른 낭만주의는 앞서 말한 시각에 반기를 듭니다. 인간의 이성은 그 그릇인 인간 자체가 불완전 하기에 태생적 한계에 봉착한다고 보는 관점이었죠. 이성과 다른 '의지'나 '욕망'이 주된 논점이었습니다. 쇼펜하우어 같은 경우, 의지와 욕망 자체가 인간의 생의 목적이라 보며 본능을 예찬했습니다. 다시 말해 뻣뻣한 이성과 다른 범주, 좌충우돌하는 욕구와 시꺼먼 욕망이 주체가 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직시하자는 주장입니다. (이 문장에서 '하잘 것 없는' 이라는 수사가 붙으면 이른바 실존주의라고 볼 수 있죠. ^^;;) 이 경우 관념에 기반한 이성은 그 힘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여기까지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고찰을 거칠게 정리해 본다면, '이성'으로서의 인간, '의지'의 발현인 인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인간에 대한 상반된 시각을 단순히 '관념'이라 용어로 한꺼번에 풀이해 버리니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것도 배신 행위의 주체인 M군의 행동에 대한 노조원의 평가는 일종의 인간을 바라보는 '관념적' 시각이라는 걸 전제하면서요. (문맥으로 보면, 조합이 느끼는 배신감 자체가 일종의 관념이라는 거죠;;) 어찌보면 인지상정이나 측은지심 등으로 간단히 옹호할 수 있는 부분을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엮어서 풀이하려고 하니 저자로서는 설명하는 말이 엉킬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위의 경우에는 롤스의 '무연고적 자아에 대한 논박'으로 풀이했으면 더 나을 뻔 했죠.


무연고적 자아란, 철저히 중립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상, 이른바 판단에 있어 기계적 중립을 추구하는 자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시다시피 현실에 존재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는 '관념적 존재'죠. 절대 다수의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을 개인적 이해 관계를 중심에 두고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굳이 돈으로 통칭되는 일반적 의미의 자본을 뜻하지는 않지요. 사회자본, 상징자본, 문화자본을 모두 아우릅니다. 여기서 노동자 계층으로서의 동질감은 사회적 자본이라고 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M군의 배반을 용서하는 행위는 공동체적 연대성이 개인적 이해관계에 개입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개별 개인의 배신 행동을 재판하기 전에, '연대'라는 상위의 가치, 즉, 노동자 계층의 공공선에 대한 숙고한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쉽게 말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 전에 그 판단의 근거가 공동체 속 자신의 어떤 부분에 부합되는지 고민하고 그 어떤 부분이 어떻게 발현되었는가(어느 사회적 경험, 여기에서는 노동자라는 계급 의식)에 대한 자기 객관화의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노동자의 존재 가치'를 빌어 관념론의 일정한 한계까지 서술하는데, 관념론에 대해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으로 나누어 부정하는 과감한(?) 주장을 내놓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붙인다면, 주관적 관념론의 거의 '매트릭스' 세상처럼 외부 환경을 무시하는 '병속의 뇌' 정도로 치부했고, 객관적 관념론은 사회가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는 조건 하에서 벌어지는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 전판 수단이라고 낙인 찍을 정도죠. 이 책의 제목이 '철학 에세이'인 걸 감안한다면, 아무리 설명의 편의를 위해서라 할 지라도 이 정도까지 내용 비약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혹시나 싶어 초판년도를 확인해 보니, 한국 사회에 계급론에 대한 의식의 바람이 본격화 되던 시기, 혹은 고착화로도 볼 수도 있는 1983년이더군요.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한쪽 극단으로 몰린 초점을 중립으로 당기려면 반대편 극단에 가까운 주장으로 비춰 봐야 한다.'라는 이른바 '기울기의 기울기' 논법이 주창될 법도 합니다. 당시 표면화된, 극도로 기울어진 지배 계층의 몰상식과 고착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면, 이정도의 경도는 용납 가능하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굳이 단정지어 말한다면, 지금 이 책은 2013년에는 걸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 서적이 아직까지 국방부 불온 서적에 선정되어 있더라도 말이죠. 지은이의 어조의 문제라기 보다, 서술에 대한 논거가 주장의 선명성에 비해 많이 투박하기 때문입니다.


훑고 보니 결국 저자가 말하는 것은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로 치환해 보자는 제안이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측면으로 보자면, M군의 배반 같은 노동자의 애환을 차라리 자본주의의 구조적 관점으로 파악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회 구성원의 인지적 부분에 대한 각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법적 권리 확대나 교육 시설 확충 등의 실제적이고 즉시적인 구조적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뭐, 노동자가 각성하면 바로 깨어 있는 시민으로 주도적 힘을 발휘 할 수 있다고 믿던 시대니까요. 실상은 조직될 수 있는 힘, 혹은 대중이 시민으로 각성하지 않더라도 그걸 조직해낼 수 있는 힘이 더 중요한데 말이죠.




Ps. 흠. 저자가 철학 전공은 아니네요. ^^;; 전공자가 아니어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 서술을 했다고 보는 건 학위에 대한 고정관념이긴 합니다. 남경태씨 같은 분은 학사 학위임에도 불구하고, 철학과 역사 부분 모두 신박한 저서를 내셨으니까요. 공부의 깊이는 학위로 판단될 건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책은 내용 전개에 있어 정밀한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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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꼬데모이쇼    친구신청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전 요즘 선물 받은 '솔로 탈출 매뉴얼'이라는 책을 읽고 있어서 ㅎ
이런 인문학 서적을 읽어봐야하는데 ㅎㅎ

꼬라박지호    친구신청

도꼬데모이쇼// 댓글 감사합니다. 흠.. 경험으로 말씀드리는 건데요, 사실 인문학 서적을 많이~ 읽으면 솔로 탈출하기가 휠씬 쉬워집니다. ^^ 더욱이 이건, 닳지도 않고 날이 갈수록 위력을 발휘하거든요.

중력렌즈    친구신청

쓰신 글을 읽어 보니 작가의 논조가 너무 낭만적으로 치달은 나머지, 분석결과가 되어야 할 근거가 희망사항으로 바뀐 듯 하군요. 전공자들 사이에서 저런 논조를 가진 사람은 아직도 의외로 많습니다. 특히나 혈기가 넘칠 때의 학부생이 마르크스를 감상적으로 접하게 되면 저런 논조가 생겨나게 되지요.

그런데 솔직히 자본론 말미나, 공산당 선언을 보면 마르크스 자신도 기껏 과학적 분석을 해 놓고, 결론은 낭만주의에 기대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러니 이런 부분에 대한 오류는 전적으로 학습자 책임이라 보기도 상당히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낭만적 관조에 대한 재조명은 한참 뒤에나 나오게 됩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가 슬슬 일어날 즈음에 '마르크시즘의 메시아적 결말은 이상하다'는 걸 깨닫고, 그제서야 '행동분석'이라는 도구를 들이댔을 때나 나타난 것이지요.

하지만 이 작업을 수행하고도 마르크시즘에서 뻗어나간 각 분파들은 재빨리 흡수하는 대신 외면합니다.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현대 사상사적 흐름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런 조류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게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이미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전후로 마르크시즘에서 뻗어나온 줄기들의 반절 이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 거지요.

그러니까 행동분석이라는 과학적 도구를 가져와 마르크시즘에 다시 한 번 재단을 하느니, 해체주의, 상대성이라는 재미있는 도구를 가져와 눈을 돌려버린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꼬라박지호님께서 쓰신 해석 방식의 '무연고적 자아'라는 것을 이용한 해석도 따지자면 그 중 일부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상대성이나 층위구분을 통해 해체 이후 재통합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모든 조각에 대한 가치 해체를 통해 분리시켜 버리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태도가 달갑지는 않습니다만.)

마르크시즘 계열들이 이런 해결방식을 가져다 차용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야기되는 설이 '행동분석'이라는 과학적 도구는 모더니즘적이기 때문에, 마르크시즘을 배우는 입장에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포스트모던을 택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끝내 저 낭만적 관점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았나 싶군요.


음.... 괜히 쥐꼬리만큼 아는 건덕지가 나와서 쓸데없이 말을 좀 많이 해 봤군요.
여튼 깊이있는 감상평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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