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완의 시대, 이승욱 · 김은산, 문학동네, 2013.
한판 붙었다. 아버지와. 이번엔 코레일 민영화 논란이다. 한국의 여느 세대가 그러하듯 부자의 논쟁은 평행선을 내달렸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간만에 귀향한 둘째 아들과 얌전한 큰 며느리도 참가한 논쟁에 아버지는 가정의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전략상 후퇴를 결정했다. 매번 그렇듯 불타올랐지만 컵 속에 놓인 향초처럼 끝났다. 아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무기 계약직에 놓인 이도저도 못한 큰아들과 밤 10시 퇴근을 감지덕지하는 둘째 아들 앞에서, 코레일 귀족 노조를 운운하는 아버지를 보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닌 3인칭의 낯선 ‘그’를 보았다. 이는 파업에 대한 논리적 합리성도 사안의 냉철한 시각도 아닌, ‘왜 자식 편을 들어주지 않지?’라는 원초적 물음의 결과이다.
사실은 맞다. 아버지가 강변하는 코레일의 귀족 노조는 대한민국 1%다. 전체 노동자의 노조 참여율이 겨우 10% 남짓한 지금 한국에서 정년과 보수가 보장되는 공기업 노조는 분명 아버지의 시각에서는 대한민국 1%일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테두리 안에서이다. 공지영의 소설, ‘의자 놀이’가 직시하는 비정한 제로섬 싸움에 익숙한 그는 진정한 1%인 기득권에게 항의해 의자를 더 쟁취하는 단결의 투쟁은 상상 범위 밖의 일이다. 그렇게 배워왔고 살아왔다. 아버지는 세상을 향해 가족의 명운을 걸고 성실히 투쟁해 왔다. 다만 그들은 타인과 어깨를 걸고 진정한 상대에게 소리치는 법을 모를 뿐이다. 이는 ‘가족 간의 각계전투 사회’의 대표적 단면이다. 이건 대한민국 윗세대 대개가 그러하듯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할 순 없다. 그러나 잘못이 없다고 해서 부채마저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제목의 강렬함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이와 같은 비뚤어진 ‘자연 상태’에 대한 책임론을 단지 사회로 전가하거나 공동체로 흩뿌리지 않는다. 그 대신 시선을 좁혀 ‘한 가정의 부모’에게 책임을 통렬히 묻는다. 과연 그 길 밖에 없었느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부모가 후세대에 행한, 자식 사랑이란 명분 깊숙이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성을 들춰낸다. 다음 세대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머뭇거림은 그 폭력의 결과이다. 이 지점에 대한 저자의 통찰엔 절로 감탄이 인다.
‘삶이라는 것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씨름하는 것,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리인’의 삶이란 이런 질문을 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리인의 삶은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주인의 의도를 이뤄내는 것이니 말이다. 대리인의 삶은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주인의 의지대로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애완견과 다르지 않다. 애완견은 나이는 먹지만 성장하지 않는다. 애완견은 보살핌은 받지만 존엄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길러졌으며 그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서적인 지체와 정신적인 미숙함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해보지 못한 채 미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의 부모처럼.’ <대리인의 삶>
결국 이 책엔 두 명의 겁쟁이가 나온다. 하나는 주저하는 자녀와 다른 하나는 반성치 못하는 아비이다. 현상은 다르지만 이 두 명의 겁쟁이가 두려워하는 본질은 외부의 시선. 그러므로 가장 욕망하는 것은 타인의 인정이다. 그러니 자평으로 삶을 지탱하는 자존의 틈새가 있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아비의 경우는 그 대상이 국가라는 게 더 지독하다. 국가로 표면화된 권력자에게 순종하는, 그럼으로써 인정받는 일치된 고양감을, 그 지리한 인정욕구를 앞으로 무엇이 대신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바닥까지 슬픈 울음이다. 페이지 한 켠에는 아비의 뿌리 깊은 회한이, 다른 한 쪽엔 자식의 방향 잃은 분노가 절절하다. 이성복 시인의 그 유명한 구절,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거짓말이다. 지금 우린 모두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다. 다만 그 통증이 일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펀치에 취한 복서처럼 몽롱할 뿐. 용산처럼 떠밀려 죽고, 쌍용처럼 돈으로 말려 죽고, 밀양처럼 전기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경적 같은 외마디 비명 속에 제 정신을 유지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다. 때문에, 때마다 둔중하게 몰려오는 편두통을 참아내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직시하라는 건 욕심일지 모른다. 타인의 외상에 대한 내면화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IMF라는 한국인의 삶을 본질적으로 뒤흔들어 놓은 쓰나미 앞에서 자식은 열리지 않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았고, 아비는 여태껏 익히며 쌓아온 정답이 눈앞에서 무너지는 걸 봤다. 그래서 저자는 2012년 대선을 부모 세대의 거대한 유아적 퇴행이라 단언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랐던, 국가 권력의 시행을 무비판적으로 따름으로 인해 느끼는 권력에 대한 귀속감. 그 친숙함을 갈구하는 애착의 결과라 평한다. 그러나 이건 애착이라기보다 학습된 무기력에 가깝다. 학습된 무기력은 무기력으로 끝나지 않는다. 떨어지는 폭이 클수록, 주저앉은 시간이 많을수록 반동은 크게 온다. 그리고 그것은 공교롭게도 자식 몫이다.
맺음말까지 게걸스럽게 해치운 후 닿은 시선은, 절절한 비탄이나 치솟는 분노가 아니다. 끝도 모를 먹먹함이다. 이 거대한 퇴행에 맞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아비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그가 나와 같은 길을 바라보려면 지난 반세기 이상의 삶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그에게 현실에 대해 직시하라는 건 그가 버텨온 삶의 레일을 탈선하라 종용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물어보자. 이럴 담력이 자신에게 있는지를. 이도저도 못해 자식은 스스로를 ‘잉여’라 치부하며 냉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냉소 속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며 앞을 보자. 애완의 시선을 견디며 살 수 없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손을 맞잡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미래의 당신과. 아이러니하게도 어른이 아이를 다독이는 세상을 위해서는 아이가 어른을 다독여야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 토닥임을 위해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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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가 뜨문하다 못해, 이제 월간을 넘어 계간 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게으름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올해부턴 부지런히 꼬박꼬박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전년도 도서 모음부터 정리해야하는데... 무조건 해야 겠네요. ㅠ.ㅠ
아래는 저번 게시 때 달린 댓글입니다. 댓글 항상 감사히 보고 있습니다. _(_.,_)_
레이피엘큐트// 좋은글입니다.회사라 초반밖엔 못읽었지만
집에가서 마저 읽어봐야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