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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간만에 독서일기. 사람의 길, 큰사람의 길. (1) 2014/01/10 AM 09:18

(보물 제613호 신숙주 초상화 (15세기작)

※ 사람의 길 큰사람의 길- 신숙주평전, 박덕규, 아침나라, 1995.

일반적으로 언뜻 신숙주라는 이름이 연상시키는 기억은 제도교육의 영향으로 인해 집현전 학자, 훈민정음 관여, 세종 때 인물 등, 단편적이지만 역사상 가치가 충분한 내용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론과는 달리 내게 신숙주라는 인물은 항상 ‘숙주나물’과 관련되어 있다. 생뚱맞게도 여기엔 내 입맛에 얽힌 사연이 있다. 매번마다 제사상에 어김없이 오르는 이 쌍떡잎식물 장미목 콩과의 한해살이풀은 내 입맛에는 최고의 반찬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 우연히 튼 TV프로에서 고령 신씨의 맏며느리의 음식에 관한 사연이 흘러나왔는데, 그 집 맏며느리님이 새댁일 무렵 제사상에 올라온 숙주나물을 지칭하면서 ‘숙주나물’이라고 말했다가 본가에서 경을 쳤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숙주나물의 정식 명칭은 녹두나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녹두나물이면 녹두나물이지 왜 귀한 그 집 맏며느리가 혼을 났어야 할까?


그 이유는 미루어 두기로 하고 예측하건데, 아무래도『사람의 길, 큰사람의 길』의 저자 박덕규는 이런 맏며느리의 악의 없는 지칭에 속을 앓았지 싶다. 그는 서문에 자신의 눈이 ‘원래는 고고했지만 결국 살아 남은 일로 치욕스런 몸이 되고도 당초의 고고함을 빛내려 애쓴 사람, 그러다가 대세에 밀려 끝내 소외된 사람, 첨예한 명분 논리의 틈바구니에서 소외되거나 왜곡되고 있으면서도 그 틈바구니의 현장에 있으려 했던 사람, 역사가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 때문에 본래의 가치마저 오염된 듯 보이는 사람.’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당당히 밝혔고, 그 눈에 띤 대상이 바로 ‘신숙주’라는 인물이었다.


신숙주는(申叔舟, 1417-1475)는 몇 번이나 핏빛 강을 건너고 살아 죽을 때까지 영화를 누린, 그리하여 오래도록 역사 기록의 전면에 부각된 사람이다. 그의 업적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대표적으로 국어국문학을 넘어 한국사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훈민정음 창제도 그가 관여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 『동국정운』도 그의 발걸음 안에 있었다. 물론 한자의 음의 정확한 표기를 위한 『홍무정훈역훈』도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안타깝게도 이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세조의 부당(?) 왕위 찬탈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세조의 왕위 찬탈에 아깝게 희생된 인재들을 기리는 과정에서 신숙주를 질타하는 역사의 도학적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같은 결과는 정사에서 야사로 입과 입을 거쳐 흐르는 가운데, 특히나 신숙주 부인 윤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악의적인 내용으로 변모해 마치 윤씨가 신숙주의 변절에 낙심하여 자살한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저자가 통탄하는 바는, 시간의 흐름마저 뒤섞어 버린(세조 2년 윤씨 부인이 병사한 것은 정월, 아들 신주가 병사한 것은 2월, 사육신 사건은 6월의 일이다) 그 왜곡된 기록이 역사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광수의 「단종애사」,박종화의 「목매이는 여자」,유치진 희곡 「사육신」)으로 바뀌어 일부가 한때 교과서에까지 실렸다는 사실이다.


결국 저자는 신숙주를 통해 묻는다. ‘명분’이란 무엇인가? ‘명분’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한 인간의 평생에 대해 한사코 죄만 묻는 것인가? 역사에 대한 평가를 할때 궁극적인 판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은 반드시 그 당대의 현실적 문제를 고려해야 하고 정당한 것의 이면에 배인 모순이며 부당한 것 이면에 감춰진 가치 있는 것들까지도 동시에 가려내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역사에 대한 이분법적인 시각이 바로 ‘악’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맏며느리는 알게 모르게 역사의 희생자라 할 수 있다. 맏며느리가 무심코 말한 ‘숙주나물’이라는 명칭어의 유례는 녹두나물의 변질에 신숙주의 변절을 빗대 나온 단어였기 때문이다.


한성의 김서방처럼 평범한 우리네는 역사의 과정이 아니라 역사의 결과만을 관조할 뿐, 탐구하지는 않는다. 감히 추측해 본다. 저자가 진정 말하고자 함은 우리의 역사의식에 대한 지금보다 반 발짝이라도 더 나아간 관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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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에 쓴 걸 발굴해(;;) 올려 봅니다. 올해는 독서 일기에 속도를 붙이는 한 해가 되겠습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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