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Whiplash, 2014)는 원스(Once, 2006)로 대표되는 위안과 이완의 단어로 축약 가능한 숱한 음악 영화와 각을 세운 보기 드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음악이란 밧줄로 관객을 옥죄죠. 그 손길은 매우 흉폭하고 매서우며 도무지 끝이 어딘지 어림하지 못할 만큼 내달립니다.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놀라운데요, ‘연주의 즐거움’이란 감성적 경험 이전에 도사린 ‘연주하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을 전면으로 드밀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두려움에 대한 해석은 이어지는 감독 코멘트로 잘 알 수 있습니다. “음악의 즐거움에 대한 영화는 너무나 많다. 위플래시는 두려움에 대한 영화다. 박자를 놓칠 수 있다는 두려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무엇보다 지휘자에 대한 두려움.” 이 팽팽한 긴장감은 영화의 도입부터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관객은 시작부터 화면가득 빡빡하게 들어찬 어둠속에서 또렷이 들리는 드럼 소리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소리는 뚜벅뚜벅 걸어오다 냅다 뛰어들어 집중한 청자들을 두려움의 한복판에 불쑥 던져버립니다. 신입생 앤드루와 폭군 지휘자인 플래처의 광기어린 하모니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이와 같은 광기의 바탕엔 연주자와 지휘자의 음악관이 공통으로 놓여 있습니다. (이 관계를 사제라 엮기엔 둘 사이 놓인 증오가 너무 깊네요) 이 둘에게 음악은 악보가 가진 음의 본질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데아의 완벽한 구현’인 셈입니다.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박자, 혹은 음. 이 숱한 요소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부딪치고 연결되어 악보가 가지는 근원의 무엇인가를 실제로서 표현할 때, 그제야 이들에게 음악은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심벌즈를 던져 부셔 버리고 싶은 쓰레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죠.
물론 차이도 존재합니다. 음악으로 음악의 주변부를 옭아매는 플래처는 음악의 정확한 구현을 ‘경력의 도구’로 활용하는 노회함도 지녔지만, 앤드루는 이제 대학에 갓 들어 선 신입생입니다. 홀로서기에 안간힘을 쓰는 나이죠. 음악을 인정욕구의 해소도구로 사용하기에도 버거울 뿐입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잘나가는 사촌들 사이에서 드럼 하나로 존재감을 나타내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플래처의 심리적 압박에 못 이겨 그를 고발하고 학교를 그만둘 때, 앤드루는 자신의 ‘시작’을 바라봅니다. 노트북에서 꺼내본 어린 자신이 드럼 스틱을 잡은 동기. ‘아버지 제 기술을 봐요!’란 대사로 점을 찍는 그 한 컷은 결국 소년의 인정욕구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어른 · 아이’라 불리는 지금, 여기의 다수가 겪는, ‘자평으로 자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공포를 눅진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죠. 이 작품은 두려움이란 감정을 음악의 테두리를 넘어 삶 전체의 지평으로 확장해 버립니다. 관객이 가지는 탄탄한 공감대는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촬영 기법도 앞서 말한 진득함의 표현에 한 몫 단단히 합니다. 사람과 악기에 대한 극단적인 클로즈업 구도는 철판처럼 강고한 결심 뒤편에 자리한 한 장 유리와 다를 바 없는 주인공의 편집증적인 심리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화 내내 ‘사람, 사람, 악기, 악기, 악기, 사람, 사람, 악기, 사람.’의 꽝꽝 때려대는 중앙 집중식 초점과 그와 비례해서 자취를 감춘 배경의 삭제는 영화의 다양한 요소를 전부 지우고 오롯이 대사와 음악만 들리고 보이게 합니다. 이와 같은 기법은 관객을 안전한 감사의 자리에서 걷어차 현장으로 몰아세웁니다. 감정의 체험을 가능케 하는 거죠.
감독의 이 같은 의도는 도입과 결말에서 보이는 수미상관 구조에서도 엿 볼 수 있습니다. 마침내 폭군 플래처를 압도한 연주를 쏟아낸 앤드루. 그 연주의 끄트머리에서 느닷없이 덮친 엔딩 크레디트 암막과 동시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위플래시 곡의 도입부는 영화 시작의 빽빽한 어둠과 동일하게 관객을 밖으로 내동댕이치는 듯합니다. ‘델마와 루이스’의 끝 장면, 절벽을 향해 뛰어드는 자동차처럼 말이죠. 다만, 이 영화는 절벽 아래 허공 대신 시속 200km로 달리다 큰 강벽과 정면충돌을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엔딩의 중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영화의 종결점에서 앤드루의 클로즈업은 미소가 화면에 담기지만 플레처의 클로즈업은 입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프레이밍은 결국 플레처의 속마음을 영화가 괄호쳐버림으로써 이 이야기의 결말을 전혀 다른 뉘앙스로도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 나에겐 눈먼 열정의 독성과 아이러니에 대한 영화로 보인다.’ 이런 눈먼 열정의 원동을 인정욕구로 해석한다면, 엔딩의 중의성에 다른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성공적 연주 후에 두 사람의 심리적 위치는 대등하게 되었을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렇진 않겠죠. 이미 지휘자는 자신의 본질적 가치를 알아주는 몇 없는 평가자입니다. 연주자는 앞으로 당분간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평가’하는 지휘자에게 아버지의 포옹으로도 채워주지 못한 ‘인정’을 바라며 매달릴 것입니다. 비루하게요. 그래서 이 영화는 서글픕니다.
감독인 데미안 샤젤은 참 젊습니다. 1985년생. 우리 나이로 서른 안팎입니다. 위플래쉬는 그의 데뷔작입니다. 그가 이 영화로 받은 상은 통틀어 140여개이고 그 중 3개는 아카데미입니다. (음악상, 편집상, 남우조연상) 삐뚤어진, 광기어린 열정에 대한 무거운 침잠이 미친 영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음악 영화지만 전쟁영화처럼 만들고 싶었다.”란 감독의 말이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절로 북돋습니다. 이런 포화라면 다음에도 그 한복판에 서고 싶습니다. 제게 심벌즈가 날아 들어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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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 쓴 감상문인데요, '문장이 어렵고 표현이 함축적이다.'란 평이 많아 쉽게 쉽게 다시 써봅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읽기 좋게 쉽게 쓰기'인 듯 합니다. 그럼 다들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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