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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1. 도식적으로 잘 짜인 영화입니다. 큰 틀에서 두 가지 대척되는 이미지가 뚜렷하게, 그리고 점층적으로 쌓여서 결말을 향해 돌진합니다.
2. 상반되는 이미지는 영화적 상징물로 관객에서 던져집니다. 여자와 남자, 낮과 밤, 계곡과 산, 내부인과 외지인, 여기까지는 양과 음의 구분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샤머니즘과 대중종교의 대비가 더해집니다. 그러나 이 구분이 이야기와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상징만 대비될 뿐 이 상징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전개 끄트머리부터 혼돈의 연속입니다.
3. 사실 제목부터가 이중적입니다. 영화 제목인 곡성은 한자로 서럽게 운다는 곡성(哭聲)이지만 구불진 골짜기 안의 성을 의미하는 곡성(谷城)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지 싶습니다. 왜냐면 영화 내내 여자-계곡-밤, 남자-산-낮의 대비되는 상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외지인 / 내부인의 구분도 인상적입니다. 특히나 외지인 / 내부인의 구분은 곡성(谷城)의 이중적 의미를 도드라지게 합니다. 사건의 실마리를 지닌, 일본인, 무명녀, 무당이 모두 외부인이고 내부인들은 이들에 의해 다만 흔들릴 뿐입니다. 그리고 영화 내내 배경이 골짜기 안으로 진행되었는데요, 최초로 산 봉우리가 나온 장면은 황정인이 마을로 들어올 때입니다. 문단 첫머리에 말씀드린 극적 대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4. 그러나 영화 자체가 모호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영화의 결말은 선명하며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도 있지만, 굳이 다양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영화 극 초반에 제시된 두 장면 때문입니다. 이 두 장면이 이야기 진행의 수면 밑에 숨어 있다가 마지막에 극적으로 부각되며 이야기를 수미상관 구조로 마무리 짓게 합니다.
5. 초반에 제시되는 누가복음 24장과 외지인인 일본인이 낚시 도중 미끼를 끼는 장면은 영화의 대부분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둘은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단어를 결정합니다. 그 단어는 ‘믿음’과 ‘금기’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금기를 지키느냐, 어기느냐?’의 한 잣대로 나누어지는 두 가지 행동의 연쇄가 이야기 진행의 원동이 됩니다.
6.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는 누가복음 24장의 내용은 등장 후 영화 내내 잠복해 있다가 천우희와 황정민 사이 갈등의 극단에 선 곽도원 앞에 느닷없이 등장 합니다. ‘사람이냐, 귀신이냐’라고 의심하는 곽도원에게 그 손을 잡음으로서 천우희는 ‘육과 신이 존재함’을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곽도원은 그 뚜렷한 증거 앞에서도 예수의 제자처럼 다시 의심합니다. 그래서 오판하게 됩니다. 극중 표현 자체는 샤머니즘의 탈을 썼지만 내용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장면이었습니다. 영화의 세련되었다고 평가 받는 건 이런 표층과 심층의 이중 구조 때문이지 싶습니다.
7-1. 누가복음 24장이 절정을 책임졌다면, ‘일본인이 미끼를 끼는 장면’은 영화의 전개를 도맡습니다. 이 미끼를 거는 행위는 '금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개 우리는 토속적인 의미를 지닌 여러 금기를 어른들을 통해 듣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금기'는 그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금기'의 내용과 금기를 지켜야할 당위성만 강조되지요. 큰 이유가 없습니다. '미끼'도 그렇습니다. 극 중 하필 곡성의 주민이 저주의 대상인지, 하필 곽도원의 가족이 대상인지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극 전개 짜임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는 거지요. 물고기 입장에서 중요한 건 '미끼가 왜 거기에 있느냐?'가 아니라 '미끼를 물지 말아야 한다.'라는 '금기를 지키는 태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절정 부분 곽도원이 천우희의 제안을 뿌리치고 집으로 들어갈 때의 장면은 금기 어김의 상징이 됩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주로 다는 금줄이 곽도원의 입장과 함께 말라버리지요. 금줄은 남성 출입 금지의 의미도 있습니다.
7-2. 덧붙여 일본인과 황정민은 여러 장면에서 공범임이 드러납니다. 동일한 속옷(훈도시), 의식 장면에서 동일한 제물(닭, 염소 - 한국 토속적인 샤머니즘에서 ‘염소’를 제물로 쓴다는 건 아주 이례적이라 봅니다.), 그리고 절정으로 치닫는 이야기 사이에 한바탕 굿판이 펼쳐진 집 중앙 우물에서 시체를 꺼내는 장면을 넣은 감독의 편집은 황정민의 굿이 효력이 없다는 것을 넌지시 알린 것이라 봅니다.
8-1. 신부 지망생의 변화는 참으로 극적이고 개연성이 충분했기에 공감의 여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은유를 함의하고 있기도 하지요. 풀어 보겠습니다. 신부 지망생 양이삼은 심약한 사람입니다. 처음 곽도원과의 만남에서 소침하여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죠. 그리고 곽도원의 윽박에 밀려 내내 달려 다닙니다. 그런데 이 신부 지망생이 삼촌의 참극을 보고 낫을 쥐게 됩니다. 한 손에 십자가와 한 손에 낫을 들고 처음 자기의지대로 토굴로 향하죠. 그리고 무서움을 이기며 일본인과 대적하게 됩니다.
8-2. 이 장면에 한 손에 십자가를 들었다는 게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저는 이 십자가의 의미를 예수가 인간을 위해 행한 ‘자기희생’이라 생각합니다. 토굴로 향하는 양이삼의 심정은 사적 분노와 공적 분노가 엉켜있습니다. 삼촌의 참극도 참극이지만 지긋지긋하게 벌어지는 살육을 ‘희생’의 의무를 진 자신의 손으로 막겠다는 각오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인간이었죠.
9. 인간이기에 양이삼은 번민합니다. 치오른 분노 속에서도 ‘내가 ‘희생’ 할 수 있을까?’라는 인간적 고민이 숨어 있습니다. 악의 존재가 이를 놓칠 리 없겠습니다. 일본인은 연민을 자아내는 표정으로 양이삼에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당신이 믿은 데로 보이지 않겠는가?’라고요. 양이삼은 흔들렸습니다. 악마의 살해 후 자신이 짊어져야할 결과의 무게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일본인을 죽여야 하는 ‘자기희생’을 피하고 싶다는 심정이 간곡했겠죠. 그래서 양이삼은, ‘당신이 정체를 밝히면 물러나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합리적인 사고라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살인 하지 말지어다.’라는 금기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수도자의 여린 심정 탓이라 봅니다. 내세의 삶을 추구하는 그에게 살인은 지옥행 차편을 예매하는 것과 다름없었을 겁니다.
10. ‘6’에서 말한 곽도원과 천우희, 황정민의 삼각 구도의 아래에는 양이삼의 행동이 버티고 있습니다. 영화의 전개에 만약은 없겠습니다만, 만약 곽도원이 천우희의 ‘현신’을 믿고 닭이 세 번 울 동안 기다렸다면, 양이삼은 일본인을 죽였을 겁니다. 내세의 지옥까지 십자가로 짊어진 ‘자기희생’의 종교적 덕목을 지키면서 말이죠.
11-1. 영화 외적으로 인상적인 부분 몇 가지를 덧붙인다면, 먼저 농촌 혹은 외지를 향한 현대의 시선입니다. 대표적인 국민드라마 ‘전원일기’, 그리고 같은 맥락으로 명맥을 이어왔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등에서 보인 친숙한 시골의 풍경은 한 세대 전의 추억으로 남은 듯합니다. 도시인으로 태어나 도시인으로 자란 지금의 20~30대에겐 농촌은 미지의 세계이며, 미지의 세계는 곧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이 영화는 그 부분을 포착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11-2. 다음으로, 주인공인 곽도원의 가족 구성도 눈여겨 볼만 합니다. ‘장모-부인-딸’의 여자 셋에 남자 한 명은 이질적 존재이고 실제 영화상에서도 가족과 섞여 있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게 가장의 짐을 짊어진 전형적인 우리네 아버지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결말 부분에서 딸이 누가 봐도 ‘다른 존재’이고 그 다른 존재가 가족의 몰살이라는 결말을 가져왔음이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딸의 안부를 연거푸 묻습니다.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걸 한편으로 알고 있음에도 말이죠. 부정은 그런 모양입니다.
12. 글 초반에도 말씀드렸지만 ‘곡성’은 아주 깔끔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깔끔함을 받치는 것은 치밀하게 계획된 이야기의 ‘도식’ 때문입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며 든 감상을 줄인다면, 동양과 서양의 아름다움이 겹쳐진 경탄할만한 건축물을 보고 나온 느낌입니다. 이런 건축물에게 아주 세밀한 잣대를 세워 벽돌 몇 개 삐져나온 것과 기와 몇 장 떨어진 것으로 평가를 깎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스멀스멀하게 기어 나오는 공포가 관객을 끝내 진흙탕으로 던져 넣은 듯합니다. 제게는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