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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
스멀스멀한 압박이 턱 밑까지 올라오는 감독의 특기는 잘 살아 있다. 극 전개 사이사이 퍼즐 조각처럼 깔아 놓은 복선도 여전하다. 영화 전체에 대한 이야기는 덧붙일 게 많지만 지금은 풋내기 언어학도로서 몇 가지 풀어보고자 하는 게 있어 ‘언어’ 부분만 집중해 쓴다. 후일 전체적인 소감을 덧붙여 보기로 한다.
일반언어학의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 이해가 훨씬 나을 듯하다. 원작을 읽어 보지는 못했으나 저자가 언어학 기초가 탄탄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외계인과의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목적으로 삼은 첫 문장, “너희들이 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를 풀기 위한 언어학적 지도는 눈길을 끈다. 자신의 이름을 소개함으로서 집단이냐, 개체성이 있느냐를 판단하는 부분, 개체의 독립성을 유지하느냐를 판별하기 위한 의문부호의 이해도 측정, 움직임을 직접 보여줌으로서 언어구조상 동사가 있느냐 등의 언어적 접근은 언어학도의 구미를 절로 돋게 한다.
다음으로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상식에 가까운 이론에 외계인이 결합하니 이 또한 재미지다. 영화의 주된 키워드로 작동하게 되는데, 여주인공이 외계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서 외계인이 사고를 흠뻑 습윤하여 ‘플래시’ 현상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은 영화를 관통하는 뼈대라 할 수 있다.
주요 갈등국으로 중국이 상정되어 있는 것에도 언어학적 고려가 숨어 있다. 외계인의 경우 표의문자를 쓰는데 이는 음운과 분리되어 있다고 소개된다. 표의문자를 쓰는 대표적인 언어가 한자를 쓰는 중국어이다. 중국어를 흔히 고립어라고 부르는데 고립어는 문장 구조에서 문장성분을 나타내는 격조사가 전무한 경우를 말한다. (참고로 한국어는 ‘은, 는, 이, 가’ 등의 주격조사, ‘을, 를’ 등의 목적격 조사가 붙어 문장성분이 결정되는 교착어이다. 영어는 단어의 형태가 문장성분에 따라 변화되는 굴절어이다) 그래서 중국어 문장에 대한 이해는 문자의 내용을 보고 훈련을 바탕으로 한 직관으로 문장 형식을 읽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흔히 한학에서 ‘백번 읽으면 제대로 읽어내고 천 번 읽으면 이해하며 만 번 읽으면 깨우친다.’라는 격언이 나오는 이유이다. 외계 문자 해독에 시간이 걸린다고 함과 동시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주인공의 태도가 여기서 비롯된다.
또한 외계인이 문자 하나로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도 흥미롭다. 이를 불교 한어로 비유하자면, '영겁'을 예로 들 수 있다. 겁은 보통 인도 산스크리스트 어의 겁파(kalpa)를 음사하여 겁이라고 한 것인데, 사전적 의미로는 '천지가 한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중요한 부분은 다음이다. 보통 '겁'을 설명하는 데는 개자(芥子) 즉 겨자씨와 불석(佛石) 즉 바위의 두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개자겁'이란 '둘레 사십 리 되는 성 중에 겨자씨를 가득 채워놓고 천인이 3년마다 한 알씩 가지고 가서 모두 없어질 때'까지를 '1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석겁'이란 '둘레 사십 리 되는 바위를 천인이 무게 3수(銖)되는 천의(天衣), 즉 잠자리 날개보다 더 얇은 깃털로서 3년마다 한 번씩 스쳐 돌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영겁은 헤아릴 수 없이 아주 긴긴 시간을 말한다.(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2009. 9. 16. 박문사) 흥미롭다라 말한 것은 영화의 외계어도 이와 동일한 단어 구성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한 부분이다. 다시말해 컨택트의 외계인은 '겁'이란 원형 문자 단 한 자를 썼음에도 서로 간 위에서 설명한 긴 뜻을 이해하고 전달할 수 있는 셈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외계인이 쓰는 문자는 전형적인 표의 문자이다. 문자가 대상을 직시하는 상형문자가 아니다. 획의 방향, 획의 길이와 굵기, 강조점 등으로 음운 구별(뜻)을 하는 표의 문자이다. 그래서 여주인공이 한 자 한 자 직접 자로 긋고 대칭점을 찾아내는 도식화한 작업을 한 것이다. 한자도 한자 부수로 쉽게 찾고 읽고 이해할 수 있듯이 외계 문자 또한 원형 전체에서 공통점을 찾고 그 사이에서 차이점을 골라내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 부분이 전개 내내 펼쳐진다. 문제는 이 부분을 골라내서 흥미를 느끼는 관객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이미 전공지식은 까맣게 잊은 오래된 언어학도가 영화를 통해 학부에 대한 추억에 빠질 줄이야. 의외의 부분에서 영화란 갈래의 말솜씨에 새삼 놀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