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햇수로 3년 전에 쓴 글인데요. 우연한 기회로 다시 쓰게 되어 재업 해 봅니다.
특별히 추가된 내용은 없지만 영어식 표현을 줄이고 쉬운 표현으로 고쳐 썼습니다.
편한 밤 되셔요.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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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2012.
헤아림에 대한 사람의 호기심은 본능일지 모릅니다. 무엇에 대해 정의하고 같고 다름을 구분 짓고 거기에다 척도를 정해 정량화하고 가치를 부여하면 통계라는 게 나오죠. 세상 수많은 것들에 대한 통계는 여지없이 존재하고 책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 흥미로운 사례를 하나 소개코자 합니다. 다음 물음. ‘20세기 이후 가장 많이 구입되었으나 가장 읽히지 않은 과학도서는?’, 다시 말해 서재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베스트셀러는 어떤 책일까요? 답은 88년에 출간된 스티븐 호킹의 대표작 ‘시간의 역사’입니다. 명료한 제목과 달리 복잡한 개념 때론 전문적 기술로 소수의 경탄과 다수의 탄식을 이끌어 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비운인 셈이죠.
그럼 이 질문의 무대를 2010년 한국으로 좁힌다면 어떨까요? 답부터 알려주는 퀴즈만큼 싱거운 것은 없지만 어쨌든 정답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입니다. 돌이켜보면 2010년의 ‘정의’ 열풍은 돌풍이라고 할 만큼 뜻밖이었고 또 그만큼 거셌습니다. 인문학 불모지라 일컬어지는 한국 도서의 생태계에서 100만부 이상(2011년 4월 기준)의 철학을 ‘팔아 치운’ 괴물의 등장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걸 반증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2008년의 촛불 집회와 2009년의 용사 참사의 참혹한 집단 상처가 2010년의 ‘정의’를 화두로 불러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 보수와 진보 너나할 것 없이 각종 매체에선 시대의 요구라 호들갑을 떨고 특히나 진보 매체에선 대중의 각성에 방점을 찍고 다시금 ‘응답하라! 2008!’을 외쳤지만 지금에서 돌이켜 보건데 이 정의 돌풍은 무기력해진 공동체적 시민의 자기 위안에 그치지 않았나 조심스레 첨언해 봅니다. 대선 이후 국민 절반을 위로해준 레미제라블의 힐링 코드와 동일하게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어려웠습니다. ‘정의’란 화두를 일반인이 자기 위안의 소비재로 삼기가 그리 녹녹치 않죠.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나 ‘타인의 피해를 최소로 하는 범주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라는 이른바 최소 · 최대의 자유론, 더불어 칸트의 선험적 도덕 주체, 나아가 좋은 것뿐만 아니라 옳은 것도 추구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덕론까지. 애당초 이 숱한 개념과 사례가 난무하는 저작이 완독되길 바란다는 것은 대중서로서는 욕심이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듭니다. 하버드생 제자를 둔 저자에게는 이와 같은 개념어들이 일상어일지 몰라도 말이죠. 오죽하면 장정일이, ‘이 책은 간단한 정리와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간단한 개념 정리만 아니라, 개념 훈련을 위한 골치 아픈 사례들이 병렬적으로 제시되어 있어 독자를 혼돈에 빠뜨린다.’라고 혹평했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정의…’의 완독보단 ‘정의…’ 강의 시청이 ‘정의…’를 대한 대중의 더 일반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정의란 무엇인가?’ 이후 국내에 소개된 대중서로는 본격적인 후속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전편의 복잡한 학설, 독자 입장에선 읽는 족족 곤혹일 수밖에 없는 추상과 딜레마 속에서의 선택 등을 훌훌 털어내고, 상대적으로 명료했다고 평가받는 ‘경제적 정의’ 부분을 집중 조명하였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앞서 말한 학자와 개념과 사례에서 학자의 전부와 개념의 절반을 덜어내고 그 빈 공간을 숱한 사례로 메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와 비교하면 다행히 전개가 아주 말랑해졌습니다. 물론 이 말랑해진 것에 대한 비평이 있을 법하나 예시의 다채로움과 메시지의 일관성은 그대로인지라 대중서로서 독자의 수용이란 측면에서 볼 때는 더 무거워졌고 어찌 보면 더 무서워졌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한국사회에선 MB 시대로 방점 찍힌 신자유주의의 횡포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전작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시사적입니다.
‘우리는 시장경제를 가진(having a market economy)시대에서 시장사회를 이룬(being a market society) 시대로 급속도로 휩쓸려 왔다. 두 개념의 차이는 이렇다. 시장 경제는 생산 활동을 조직하는 소중하고 효과적인 도구이다. 이에 반해서 시장사회는 시장가치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간 일종의 생활 방식이다. 시장사회에서는 시장 이미지에 따라 사회관계가 형성된다.’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서문>
저자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폐해를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상징되는 탐욕이라 규정짓지 않습니다. 탐욕은 거래만능시대의 부분적 진단일 뿐이라 말하죠. 본질은 시장이 시장가치가 원래 속하지 않는 영역으로 팽창한다는 것, 그리고 현대정치가 이와 같은 시장팽창에 대해 도덕적 잣대를 들어 논쟁하길 꺼려한다는 점입니다. 중세 암흑기 신앙에 대한 도그마가 이제는 그 주체만 시장으로 바뀌어 일상으로 스멀스멀 파고들고 있고 그리고 정치는 이런 경제 만능주의를 방관하고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는 지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치판단을 위한 질문은 경제학자의 시각으로만 재단되어 있습니다. 샌델은 경제학자들 질문의 밑바탕엔 ‘그건 얼마죠?’만 있다고 꼬집고, 이 책을 통해 ‘그래, 과연 이것은 얼마냐?’라 지독히도 되묻고 있습니다. 그것도 나선형으로 사례를 늘리고 논점은 좁히면서 말이죠.
평등주의 원칙이 내재된 줄서기의 도덕을 위협하는 ‘각종 새치기’는 얼마에 거래되는가?, 임신 권리를 스스로 사고파는 대리모와 불임시술에 대한 인센티브는 얼마가 적당한가? 신의와 우정의 상징인 사과와 축사를 대행해주는 대리사과서비스와 결혼식 축사판매는 어느 정도 가격이면 적당한가? 주경기장에 붙는 명칭의 가격은 얼마에 거래되어야 하는가? 나아가 사고를 대비한 생명보험이 이윤창출의 수단인 사망채권으로 변질된 경우, 내 목숨은 얼마인가? 독자는 독서의 과정 속에서 현재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이 숱한 현실에 대해 일일이 생각하고 답해야 노역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친절하게도 저자는 이 물음에 모두 통용될 수 있는 잣대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것은 ‘공정성’과 ‘부패’입니다. 공정성이란, ‘구성원 모두가 공정한 조건에서 거래를 이룰 수 있느냐? 다시 말해 시장의 거래가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를 보장하는가?’에 대한 평가입니다. 다음으로 부패는, 어떤 대상이 재화로 규정되는 순간 변질되는 대상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규준입니다. 풀이하자면 공정성은 사회적 약자의 불평등한 교섭력에 대한 지적(가난한 이의 생계를 위한 신장거래)이고 부패는 교섭력의 차이가 없다하더라도 거래될 수 없는 대상(우정, 사랑 등)이 있음을 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쓴 자는 읽는 이에게 이 두 가지 잣대로 시장주의 사회를 살면서 나름의 가치관을 세울 수 있게 도움 준 후 시장의 맨얼굴을 직시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시장은 특정 가치를 구현하고 한 번 재화화된 공동체 규범이나 추상적 가치에 대하여 반드시 생채기를 남깁니다. 이는 이스라엘 어린이집을 대상으로 한 유명한 실험으로 입증되었는데요,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늦게 데리러 오는 부모에게 벌금을 도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사실상 아이를 늦게 데리러 오는 경우를 두 배로 늘리게 했습니다. 부모들은 벌금을 지각에 대해 자신이 자발적으로 지급하는 비용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어린이 집이 약 12주 후에 벌금제도를 없앴지만 아이를 늦게 데리러 오는 부모의 수는 늘어난 상태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겁니다. 어린이집과의 약속을 위해 제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가 금전적 지급으로 잠식당하자 학부모들이 과거의 의무감을 되살리기가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이 책이 강조하는 점은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시장은 단순한 메커니즘에 불과하지 않다는 시장사회의 수면 아래 진실입니다.
이 시장사회에 속 우리의 자세로 저자는 지금 공동선에 대한 고민을, 그리고 그 고민의 바탕인 시민의식을, 나아가 시민의식의 함양을 제도적으로 북돋는 정치적 토론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정의로운 사회의 기본 조건을 좋은 삶에 대한 기준이라고 강력히 변론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금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샌델은 이타주의 · 관용 · 결속 · 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라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고 평합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정치에서 정치인들이 도덕적 논쟁에 대해 피하지 말고 지속적인 자극으로 우리가 필요한 가치를 공유하도록 일깨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제는 철학의 한 분파였던 정치철학이 철학 전면에 나서야할 시기가 도래한 셈입니다.
우스개 같은 이야기이나, 2010년 마이클 샌델이 내한 했을 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정의는 왜 지켜야 합니까?’였다고 합니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일화가 우리사회에서 납득할 만한 범주에 든다는 게 현재 대한민국의 분명한 불행이라 여겨집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돈으로 사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다행히 이번 작품은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닌 모호함에서 벗어났습니다. 답은 언제나 책속에 있지요. 그러나 단언컨대, 정답은 분명 보이는 길이나 그 길은 모진 가시밭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항상 실천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종종 꼬박,님 떠올랐는데 때마침,. !_!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