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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기] 독서 일기 (0) 2011/04/21 PM 04:29
2011.04.21 목 16:29

※ 세계철학사 p.894~p.954

오늘 읽은 내용은 실존철학, 하이데거, 마르크스이다.

실존철학의 원류는 키르케고르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만 원류라고 보기 보다는, 실존철학의 본류를 만들어낸 지류 중 가장 큰 지류가 키르케고르라고 보는 게 맞겠다.

실존철학의 공통점으로는,
1. 실존이란 언제나 인간의 실존이다. 실존은 인간에게 특유한 존재양식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철학은 '인본주의적'이다.
2. 실존이란 언제나 개인의 실존이다. 그것은 개별 인간의 특유한 존재양식이다. 이런 점에서 실존철학은 '주관적'이다. 이 부분에서 생철학과 실존철학이 나뉜다. 생철학은 개인의 존재가 초개인적 '생의 흐름'의 한 지절이라고 보는데, 실존철학은 이보다 개인에 보다 집중한다.
3. 실존철학은 사물을 기준으로 인간을 측정하지 않는다. 그 전의 형이상학을 비롯한 여러 철학이 인간을 '분석할 수 있는' 객체로 보는 반면(여기서 설명이 필요하다. 실존 전의 철학은 '사물[여기서 사물이란 확정된 본질을 가지고 있는 가진 실체]'을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했다) 실존철학에서는 인간을 미확정 존재로 보기때문에 평가 할 수 없다고 본다.
4. 실존은 존재자에 대한 직접적 파악이다.(여기 설명이 무지 들어가는데 생략한다;;)
5. 실존은 역동적이다. 실존이란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6. 실존철학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개인을 고립시켜 고찰하는 의미의 '개인주의'는 아니다. 개인을 항상 세계 및 타자와 연관시킨다.
7. 실존 철학은 구체적 경험을 중요시한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체험에, 사르트르는 보편적 혐오감, 야스퍼스는 이른바 '한계 상황'에서의 경험이 핵심 사상을 이룬다.

실존철학이라는 것은 양면적인 면이 많다. 인간의 이성을 한계짓는다는 점에서는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과소평가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반면, 개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초점을 맞추어 그 전에 종의 개념에 뭍혀버린 개체를 드러낸다. 이런 양면성은 이상학의 극한이라고 보았던 칸트 철학 이후의 여러 사상(스펜서 입장에서는 역사의 종 발전이라고 본 것들이)들이 결국 가장 원초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의 해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쇼펜하우어 이후,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함과 동시에 이성적인 결론의 합도 결국 파멸을 부를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발견함으로서 인간 자체에 대한 공포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하이데거.

하이데거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이다. 그는 인간을 현존재로 보았고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다. 이 말은 두 객체의 공간적 병존이라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포함되어 있음의 공간적 의미로도 이해되면 안되면, 주체와 객체로 양분되어서도 안된다. 세계-내-존재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이다. 인간 현존재는 "그의 거기에 내던져져"있다.

위 말을 내가 해석한대로 쓰자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자연상태와의 합일이라는 거다. 이를 현상적 자연과 혼동하면 안된다. 여기서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 존재를 이루는 뫼비우스와 같은 띄다. 환경이라 말하기는 버겁고, 아.. 이해는 대충되는데 말로는 설명을 못하겠네.(이건 내가 모른다는 거다;;)

문제는 하이데거는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철학용어를 일상용어로 혼용해서 쓰기도하고 자신만의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더 웃긴 것은 자신이 지평선 같은 진실에 근접해 있고, 이런 진실을 바로 알려고 하는 노력은 그 자체가 본래적 진실을 덮는 역할을 하기에 이에 대한 접근은 '깨달은 소수'만이 접근 가능하다는 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굳이 '진실'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만 알라는 거다;;' 이 때문에 헤겔에게 퍼붓는 쇼펜하우어의 비난처럼 하이데거를 비난하는 후학들이 많다.

한부분 옮겨본다.

[사려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은 사유하게끔 한다. 도대체 무엇이 가장 사려되기를 바라는가? 사려되기를 바라는 우리들 시대에 그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우리가 아직도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것도 세계의 상태가 갈수록 걱정스러운 것이 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깊이 사려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마르크스.
유물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유물론 중 중요 내용 중 하나는 물질에 부과되는 무한성인데, (물질은 무한하고 시간적에 독립적이며, 변형 만한다) 이는 현대 물리학의 빅뱅론에 어긋난다. 그래서 현재의 맑시즘은 19세기말에 등장한 위와 같은 '속유물론'이 아니라 다르게 해석된다. 그리고 상부구조 하부구조가 나오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가 맞는가 틀린가 보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이에 대한 비판을 어떻게 방어했는가를 보는 것이다. 레닌과 더불어 스탈린의 방어 논리가 참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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