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이 100명을 겨우 넘는 작은 학교였다.
우리 학년은 2개 반이었고 다른 학년은 모두 한 반씩.
아침에 등교하면 제일 먼저 2층 복도 중간에 있는 온장고에
도시락을 집어넣는 게 일이었다.
온장고가 하나 뿐이라, 전교생의 도시락이 들어가기엔 좀 모자랐다.
특히 1, 2학년도 오후 수업을 하는 화요일은 특히 그랬다.
꼭 누구 한 놈이 온도를 최고치까지 올려 놓아서
점심시간 쯤 되면 도시락 바닥에 누룽지가 생길 정도였다.
교실은 무척 넓었다.
아이들은 둘씩 짝을 지어, 세 분단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뒤로 교실의 절반 정도가 빈 공간으로 남았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이 뛰어놀기엔 제법 괜찮은 정도였다.
여자아이들은 복도 마루에 앉아 공기놀이를 했고
난 남자아이들의 난폭한 놀이보다는 그쪽이 마음에 들었으나
감히 여자아이들 사이에 낄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교실 뒤엔 중년 남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은 그 사람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몰랐으나
한 아이의 말로는(그의 아버지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데 보통 사람이라고 했다.
난 그 말이 퍽 이해가 되질 않았다.
쉬는 시간엔 항상 풍금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보통은 학교 종이나 비행기 같은 간단한 곡이었으나
간혹 엔터테이너 같은 고난이도 곡이 연주되는 날도 있었다.
당연 그 땐 제목 같은 건 아무도 몰랐다.
몇 년 후에야 우리는 그 곡을 구두광고 음악이라 불렀다.
운동장 한 켠엔 아이 네다섯이 끌어안을 만큼 큼직한 나무와
펌프가 하나 있었다.
여름에 운동장에서 내달린 아이들은
그 펌프로 끌어올린 물을 서로에게 부어주곤 했다.
물론 물 한 바가지 남겨놓는 건 반드시 잊게 되는 일이라
항상 물주전자를 가지러 교무실에 갈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나는 그래서 가위바위보가 싫었다.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아이들은 별 수 없이 운동장에 모여야 했다.
어른들 기준에는 만화영화보다는 올림픽이 우선이었다.
노는 건 평소와 다름 없었지만
대부분 기운이 없었다.
1학년 교실 앞 현관으로 나오면 화단이 있었다.
튤립 꽃이 피면, 교장 선생님이 아무리 혼을 내도
아이들은 그 꿀을 빠는 데 여념이 없었다.
다만 입에 개미나 벌이 들어가는 건
아이들 기준으로는 심각한 사고였다.
화단 옆의 계단을 오르면 강당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이 되면
전교생이 그 강당에 모여 영화를 봤다.
가끔은 호소자나 영환도사 같은 영화도 나왔지만
보통은 똘이장군 시리즈였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올 때마다
절대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그래서 북괴군으로 위장한 늑대들에게 잡아먹히지 않기를 기도했다.
겨울이 되면 교실마다 난로가 놓였다.
주번이 된 아이들은 아침마다 왕개탄을 얻으러 가야 했다.
소사아저씨께 하나만 더 달라고 조르면
아저씨는 날도 안 추운데 엄살피우지 말라며 타박을 하면서도
아이들의 양동이에 왕개탄 한 두개씩을 더 넣어주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동네는 우리나라에서도 추위로 손 꼽히는 동네의 산골이었다.
그곳을 떠난 지 20년이 넘어 다시 찾았을 때
학교는 이미 부근의 중학교와 합쳐져
학교가 있던 자리엔 넓은 공터만이 있을 뿐이었다.
벽돌담장도 철망으로 바뀌어
그 안에선 바람만이 어지러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