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부대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부대는 모든 소대원이 이발병이거나 다리미병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소대장의 비공식 사노예인 통신병 빼고.
물론 이렇게 하면 인원이 너무 많으니까
보통 상병 꺾일 때 쯤이면 관리직이 되고
병장 쯤이면 거의 손 놓고 쉬는 분위기이긴 했는데.
하여간 내가 일병 달고 이발병의 주축이 되었을 때였다.
머리 깎다가 뭔가 이상해서 주위를 둘러 봤더니
이등병 녀석들이 안 보이는 거다.
신병 하나 빼고.
그래서 그 신병에게
"혹시 이발병 애들 내무실에 있으면 불러 와라."
라고 했는데
잠시 후 이발병 왕고(병장 5호봉)가 찾아와 소리치기를
"야 바나나 이 개생키야, 니가 나 불러오라 그랬냐?"
알고보니 그 신병이 내무실에 갔더니
이발병이라고는 그 왕고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 병장님, 바나나 일병님이 부르십니다."
라고 했다고...
가위가 그렇게 무서운 흉기인 줄 처음 알았다.
갓 상병 달았을 때
연병장에 침낭을 널다가 내가 음료수를 쏘게 되었다.
나야 부사관에 합격해서 그달 말이면 떠날 몸이라
무척 관대해져 있는 상태여서 별 생각 없이
함께 침낭 널던 이등병에게 돈을 주고 콜라 피티를 사오라 했는데
그 이등병이 초코우유를 마시고 싶다는 거다.
물론 관대했던 나는 그걸 꾸짖는 대신 웃으며
"이 생키 조낸 빠졌네. 니 위로 내 밑으로 다 불러와."
라고 농담을 했다. 물론 초코우유도 사오라는 말도 덧붙여줬다.
근데 이 이등병이 내무실에 가서 전한 말은
"바나나 상병님이 소대 다 집합하시랍니다."
였다.
부사관이고 나발이고 의병 전역하는 줄 알았다.
덤으로 이건 기겁한 건 아니고 정색한 얘기.
하사 달고 다시 자대로 왔을 때
당연히 원래 고참이었던 양반들도 몇몇 남아 있었다.
어쨌든 다들 나에게 존대를 해 줬고
나도 사람이니까 엔간하면 둘만 있을 땐 그냥 반말하라고
그런 식으로 넘어가곤 했었다.
몇몇은 그런 얘기도 하기 전에 알아서 말 놓는 양반들도 있었는데
딱 두 명에게는 내가 정색하고 조진 적이 있었다.
하나는 나보다 두 달 고참이었는데
소대에서 좀 고문관 취급을 받았던 데다 나와는 별로 사이도 안 좋았던 양반.
근데 하나는 나보다 두 달 후임이었다.
말 놓는 게 하도 자연스러워서 옆에 있던 병장이
"야 이 미친 놈아, 너 원래 바나나보다 후임이잖아."
라고 하기 전엔 나도 눈치를 못 챘었다.
하긴 나보다 나이는 많았으니까.
근데 그 얘기가 걔네 부소대장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군기교육대 갔다 왔다던가 뭐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