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미래'에서 '내 일'로 찾아온 기후변화 (128)
IPCC 6차 평가보고서의 '마지막 보고서' 발표
IPCC 워킹그룹 III의 6차 평가보고서, 그래픽으로 살펴보기
195개국 집단지성의 만장일치를 뒤집은 인수위의 근거는?
지난 4일,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에서 새로운 보고서가 공개됐습니다. 워킹그룹 III(제3실무그룹)의 6차 평가보고서입니다. 지난주 연재에선 6차 평가보고서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봤습니다. 195개 회원국에서 모인 실무그룹이 2015년부터 전 세계 각국에서 진행된 관련 연구자료들을 취합하고, 이를 종합해 195개 회원국이 모두 만장일치 한 내용만을 담은 보고서였습니다.
보고서에 담긴 현실과 미래는 이전보다 더 팍팍해졌습니다. 이미 오늘날 지구 평균 기온은 기준점인 산업화 이전(1850~1900년) 때보다 1.09℃ 올랐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각국이 내놓은 2030년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달성한다고 했을 때, 그에 따라 탄소중립 시점이 2065~2070년 즈음으로 늦춰졌을 때, 우리는 1.5℃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실패하고 맙니다. 온실가스 감축의 고삐를 죄지 못하고, 감축의 큰 부담 없이 2095년 즈음에서야 50% 감축을 하면, 2100년 지구의 평균 기온은 기준점 대비 무려 2.7℃나 높아질 것으로 나타났죠.
보고서가 주목하고, 강조한 감축 방법은 에너지전환이었습니다. 195개국이 참여하고, 모두가 개별 문장 단위로 동의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이다 보니 발전부문의 감축 옵션엔 재생에너지부터 원자력, 석탄, 석유, 가스 등이 모두 망라됐습니다. 거론된 옵션 가운데 그 무엇도 풍력과 태양광 발전의 감축량을 쫓아오지 못했습니다. 비용 측면에서도 두 옵션은 절대적인 가성비를 보였죠.
'기술을 통한 기후위기 극복'이라 불리는 원자력과 CCS의 경우, 결과가 썩 좋지 못했습니다. 이 둘을 합친 감축량은 태양광 발전을 통한 감축량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원자력의 경우, '그게 무슨 감축 옵션이냐' 비아냥의 대상이 된 '메탄 배출을 줄인 석유 및 가스'보다도 효과가 작았죠.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의 평가가 엇갈린 측면은 가성비만이 아니었습니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UN은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SDG)를 만들었습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두가 더불어 공생하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종류별로 나눈 것이죠. 총 7개의 발전부문 감축 옵션 중 SDG에 가장 많은 긍정 영향을 미친 옵션은 풍력과 태양광이었습니다. 원자력의 경우 SDG 8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성장', SDG 9 '산업, 혁신, 인프라' 단 두 가지를 제외하곤 100% 긍정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었습니다. 또, SDG 6 '깨끗한 물과 위생'에 있어서 CCS와 함께 7개 옵션 가운데 유일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옵션으로 분류됐습니다. 원자력과 CCS는 양적 평가와 질적 평가 모두에서 발전부문 7개 주요 감축 옵션 가운데에 하위권에 머물렀습니다. 사실상 원자력과 CCS는 '감축 옵션 항목에 포함됐다'는 것 외엔 크게 내세울 것이 없는 셈이죠. 원자력과 CCS가 발전부문의 온실가스 감축에 있어 '메인 스트림'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만약 국내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자료가 발표됐다면, 일각에선 “탈핵 진영의 선동”이라고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IPCC의 회원국엔 원전을 두고 논란이 한창인 우리나라뿐 아니라 '원전에 진심'인 프랑스도 있습니다. 또한 극단적인 수치는 모두 배제됐습니다. 모든 국가의 과학자, 당국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세계 각국에서 진행된 연구자료를 면밀히 평가했고, 모든 나라가 동의하는 내용이 담긴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원전의 기저발전화'를 넘어 '원전의 발전믹스주력화'를 외치는 주장이 '메인 스트림'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물론, 주장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IPCC와 195개 회원국이 과학과 숫자, 데이터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과는 달리 국내에선 '정치'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죠.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프레이밍'으로 여론을 형성하면, 그 여론을 바탕으로 나름의 당위성을 얻는 방식입니다. 195개국의 집단지성, 그들의 만장일치를 뛰어넘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게 다 탈원전 때문'이라는 표현은 정권 교체를 앞둔 시점에서 다시금 불거져 나왔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전기요금 상승 압박이 커졌다는 겁니다. 하지만 최근 3년간 우리나라의 원전 발전량은 꾸준히 증가해왔습니다. 2020년 기준, 원전 발전량은 160.2TWh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탈원전 선언'은 있었으나, 현실의 전력공급 구조에선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겁니다. '탈원전을 선언해놓고는 실천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탈원전 선언이 실제 정책으로, 발전믹스의 변화로 이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지난 여름에도 '이게 다 탈원전 때문'이라는 주장이 한바탕 뉴스를 뒤덮은 적이 있었습니다. 탈원전 정책으로 전력수급에 위기가 닥쳐 '블랙아웃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역시, 실제 원전 발전량 추이도 살펴보지 않은 채, 블랙아웃의 개념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지 않은 채 나온 주장이었습니다. 앞선 연재 〈[박상욱의 기후 1.5] 전력수급, 진짜 위기? 원전이 해결책? 동문서답에 허송세월하는 탄소중립〉에서 자세히 설명해 드렸듯, 내륙 지역에서의 대규모 정전은 지난 2011년 9월 15일에 발생했습니다. 그 해 원전의 발전비중은 31.1%로 최근 10년 가운데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역대급으로 원전의 발전 비중이 높았던 상황에서 사회 곳곳이 마비되는 블랙아웃이 발생한 것이죠.
사실, 현대사회에서의 블랙아웃은 발전설비의 부족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한 예비력을 확보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이유에서 블랙아웃이 발생할까요. 바로, 수요 예측의 실패입니다. 블랙아웃이 발생했던 2011년 9월 15일, 이날 기록된 최대전력은 6만 7281MW로, 그해 9월의 다른 날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고 바로 전날, 최대 전력수요는 크게 줄었죠. 평소 10% 안팎을 유지하던 전력 예비율은 19.4%에 달했습니다.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15일에도 마찬가지로 전력 수요가 적을 것으로 예상했던 겁니다. 결국, 예년 수준 정도의 전력수요에도 적은 공급량 탓에 블랙아웃 당일의 공급 예비력은 5%에 불과했습니다. 갑작스럽게 공급과 수요의 격차가 줄어들자 긴급 순환 정전이 실시됐고, 갑작스러운 정전에 사회 곳곳은 큰 혼란이 일었습니다.
블랙아웃은 특정 발전원의 탓이 아닙니다. 수요 예측의 정확성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블랙아웃에 가장 취약한 발전원은 '경직성 전원'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수요에 맞춰 발전량을 신속하게 조절할 수 없는, 유연성 없는 전원 말이죠. 대표적인 경직성 전원은 바로 원전입니다. 순간순간 원자로의 출력을 조정할 수 없기에, 블랙아웃의 위기에서 그러한 경직성은 도움보다 도리어 위험요소가 됩니다.
전기요금의 인상 압박은 이전 박근혜 정부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꾸준히 오르던 요금이 박근혜 정부에서 정점과 함께 정체기에 머물고, 상승 기조가 이어지지 못한 것이죠. 지난 10년을 돌아봤을 때, 쌀값부터 유가에 이르기까지, 물가에서 원자재까지 거의 모든 것들의 가격이 급등했습니다. 탈원전과 별개로, 요금의 조정이 이뤄져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의 전기요금은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우리나라보다 전기요금이 저렴한 나라는 온갖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나라뿐입니다.
독일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우리나라의 4배가 넘고, 원전의 발전비중이 우리나라보다 한참 높은 프랑스도 전기요금이 우리의 2배 이상입니다. 원전 비중이 높아져서 요금이 저렴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전기요금 체계가 비정상적인 것이죠. 발전비중과 상관없이 지금의 국내 전기요금은 의도적으로 억제된 상태입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 어떤 정당도 이러한 비정상적인 가격 체계를 손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연재 〈[박상욱의 기후 1.5] '청사진'만 있고 '청구서'는 없다? 윤석열 당선인의 기후 정책〉에서 '원전의 기저발전화'라는 공약의 최소 견적을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35%의 발전비중을 달성하려면 2050년 최소 50기의 원자로가 아무런 사고나 문제없이 최대한 가동되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26기의 원전을 더 지어야 하는데, 건설비용으로만 최소 130조원이 필요합니다. 1980년대에 지어진 노후원전을 2050년까지 가동시키기 위한 개·보수 비용이나, 26기의 원자로가 들어설 부지를 찾고, 지역사회와의 협의를 이끌어 내는 데에 투입되는 비용은 모두 제외한 비용입니다. 당시 연재에선, 이처럼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정책을 공약하면서도 전기요금 동결 등을 약속했다는 점을 강조해드렸습니다. '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전기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다'며 책임을 전가할 상황이 아닌 것이죠.
전기요금의 인상 요인은 지금껏 너무도 많았습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합니다만, '원전 100%'로 우리나라의 전력 공급이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요금은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원전을 짓든, 재생에너지를 설치하든, 발전소와 송배전망을 설치하는 데엔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원전을 축소하고,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겠다 공언했던 이재명 후보도, 탈원전을 폐기하고 에너지믹스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윤석열 당선인도, '전기요금 정상화'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죠.
앞선 연재에서도 거듭 설명해 드렸듯,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IEA(국제에너지기구) 조차도 2050년 글로벌 원전의 발전 비중을 9%대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들조차 발전의 메인 스트림은 재생에너지(2050년 발전비중 68.6%)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죠. 그저 어림짐작으로 나온 숫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수십, 수백 페이지의 보고서를 통해 밝힌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재생에너지 발전비중 70%의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10년 가까이 제주도에서 탄소중립을 위해 재생에너지 비중을 최대한 끌어올렸는데, 18%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IPCC는 제3실무그룹의 6차 평가보고서에서 지역별 재생에너지 잠재력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갔습니다. 전 지구에 걸쳐 얼마나 많은 발전 잠재력이 있는지 면밀히 따져본 겁니다. 위의 지도는 195개국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고민하고, 100% 만장일치 한 결과를 나타낸 것입니다. 색이 진할수록 각 발전원별 발전량이 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과연, 항간에 떠도는 '우리는 유럽이랑 기후가 달라서 어렵다'는 말은 근거가 있는 말이었을까요. 결과는, '대한민국도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였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한…” 그런데, 해외에도 사계절은 분명 존재합니다. 적어도, 우리와 위도가 비슷한 지역에선 말이죠. 그럼에도 어릴 적부터 맹목적으로 주입된 지식에 해외여행을 통해 온갖 계절을 몸소 경험하더라도 이 인식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습니다.
재생에너지 발전비중이 무려 41%에 달하면서 글로벌 에너지전환을 선도하고 있는 독일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태양광 발전 잠재력은 월등히 뛰어났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위도가 높은 독일은 남부지방과 북부지방 간의 격차가 컸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의 전역이 독일의 남부지방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정도였습니다.
육상풍력 역시 충분한 잠재력을 보였습니다. 위도가 높은 독일의 북부지역은 평균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유리한 입지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따라 나 있는 바람길의 경우, 도리어 독일의 북부지역보다 더 나은 잠재력을 지녔습니다. 이 지역에선 독일과 맞먹는 고효율 풍력 발전이 가능한 것이죠.
육상을 넘어 해상풍력까지 살펴보면, 독일과의 격차가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격차가 '우리는 해상풍력을 못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우리의 바다보다 위도가 한참 높은 북해는 워낙에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로 유명합니다. 다만 우리는 삼면에 고르게 바다가 퍼져있고, 그 잠재력 역시 발전단지를 건설하기에 충분하죠.
풍력발전과 태양광 발전의 특징은 '분산형 전원'이라는 점입니다. 어느 구석에 오염물질이나 위험요소를 지닌 발전소를 두고 전국 각지에 전기를 보내는 '집중형 전원'이 아닌,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곳곳에 위치한 발전원인 것이죠. 이런 측면에선 오히려 우리나라가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발전망과 송·배전망을 구축하기에 더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부지방의 전기는 남부지방에서, 중부지방의 전기는 중부지방에서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송전할 수 있는 환경인 겁니다.
원전이 기저발전원이 됐을 때, 심지어 30% 넘는 발전비중을 차지하는 기저발전원이 되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35%라는 발전비중이 가져올 50기의 원자로는 곧 3면의 바다 거의 모두에서 원전이 가동된다는 뜻이죠. 이는 비단 '리스크'의 차원을 뛰어 넘는 이야기입니다.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일이죠. 이미 글로벌 전력 시장에서 각각의 발전원별 발전단가가 어떠한지 답이 나와있습니다.
이에 대해 지난해 9월 〈[박상욱의 기후 1.5] 탄소중립, 한국만 유별? 재생에너지는 비싼 에너지?〉에서 각 기관별로 집계한 발전단가를 전해드렸습니다. '원전은 가장 저렴한 전력 공급원'이라는 주장은 이를 뒷받침할 논거가 매우 부실한 상태입니다. 당장 그 기준이 되는 우리나라의 가격 체계는 글로벌 가격 체계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죠.
또한, 전력망 차원에서도 이로 인해 야기될 문제가 무엇인지 이미 국제사회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문제와 대응책에 대해선 추후 연재를 통해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195개국의 집단지성이 만장일치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외친 것은 그저 감성에 젖은 주장이 아닌 겁니다.
우리가 그간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 한 사이, 글로벌 시장에선 여러 기업들이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때 '태양광 글로벌 1위'였던 우리나라 기업의 순위는 7위로 밀려났습니다. 풍력 발전의 경우, '글로벌 Top 10' 순위표에서 국내 기업은 단 한 곳도 이름을 올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전환의 물결을 외면하고 1970년대부터 이어져온 발전방식을 고집하는 중입니다. 마치, 모든 자동차 제조사가 전기차 회사로 탈바꿈하는 2020년대에 '하이브리드가 됐든, 새로운 E-Fuel이 됐든 수십년간 이어왔던 내연기관을 주력 운송수단으로 삼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자동차 제조사가 이렇게 나온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매출 하락, 투자유치 실패, 주가 폭락 등… 기업 스스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테니까요. 하지만 발전은 다릅니다. 발전 회사는 사기업이 아닌 공기업이고, 리스크에 빠지는 것은 다름 아닌 '국민의 돈'입니다.
'국익을 위해서'라는 설명 또한 그 의미가 애매모호합니다. 원전의 운영사도, 원자로의 공급사도 모두 독점 체제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운영사는 한국수력원자력 한 곳, 원자로 공급도 두산중공업 한 곳이 도맡고 있죠. 원전의 건설은 지금껏 현대건설(14기), 동아건설(6기), 대우건설(4기)만 참여했을 뿐입니다. 똑같은 세금을 투입했을 때, 실제 '국익'이 더 큰 것은 어느 쪽일까요. 제한된 시장에 제한된 기업이 참여하도록 돕는 일일까요. 아니면 더 많은 기업들이 더 넓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일까요.
진영 논리에 따라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구분 지으려는 주장 또한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원자력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세계에서 21번째로 핵 발전국 대열에 참여하게 돼 과학 한국의 모습을 자랑하게 됐다. 이제 우리는 태양열과 조력, 풍력 등 새로운 자원을 연구, 개발하는 데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힘써야겠다.”
1978년 고리 원전 1호기 준공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국내 최초의 원전이 만들어진 자리에서 원자력계에 대한 격려에 이어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 겁니다. 또한, 지금의 글로벌 재생에너지 시장은 말 그대로 '무한 경쟁'이 펼쳐지고 있는 시장 중의 시장입니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가 아닌, 국가 차원에서 패권을 쥐기 위해 모두가 혈안인 상황에서 이 시장을 외면하는 결정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가, 어떻게 질 수 있을까요.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전환에 나서는 것은 원자력계를 궁지로 몰아넣거나 원자력 기술을 천시하려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러려는 시도를 하는 쪽이 있다면, 그 역시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원자력과 관련한 학문과 기술은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엑스레이를 비롯해 암 치료 등 의학 측면에서도 큰 도움을 받고 있죠. 시민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라돈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원천기술도 관련 학계의 몫입니다. 건설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비파괴 검사 등 원자력 기술은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에너지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죠.
에너지전환을 이야기할 때마다, 원전의 문제점이 드러날 때마다 원자력계가 보이는 반응은 통상 이랬습니다. 부실시공으로 '비행기가 직접 타격해도 안전하다'는 격납건물의 외벽이 아파트 외벽보다도 얇게 만들어졌음에도, 안전관리자가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에서의 방사성물질 유출을 지적했음에도, 후쿠시마 참사와 같은 중대사고를 막겠다며 설치한 장치에서 도리어 불꽃이 튀는데도… 전문 지식을 가진 원자력계 전문가가 먼저 나서서 문제를 규명하고, 책임 소재를 찾기보단 '큰 문제 아니다' 이야기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마치 검사나 판사는 없이 변호사만 있는 법조인 집단을 방불케 합니다. 이 때문에 혹자는 '원전 마피아'라고도 부르죠.
이러한 시스템의 문제는 원자력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관-기업-학계의 전문성에 기반한 탄탄한 시스템이 구축된 원자력계가 스스로의 견제와 감시에 부실했다면, 재생에너지의 경우 아직 '시스템의 구축' 자체가 이뤄지지 못 한 상태입니다. 전문성에 기반한 탄탄한 시스템을 통해 건전한 성장을 도모해야 하죠. 그러지 못 한 상태에서 서둘러 양적 팽창만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보조금 잔치가 곳곳에서 펼쳐지고, 보조금 '루팡'이 곳곳에서 넘쳐날 겁니다.
지난 22일은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기후변화 대응은 더 이상 '빨간 수은주를 물고 땀을 뻘뻘 흘리는 지구'를 살리고, '삐쩍 마른 북극곰'을 살리는 수준의 일이 아닙니다. 당장 우리의 의식주 모두를 위협하는, 국가 경제와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는 '현실 속 위협'이 된지 오래입니다. 왜 미국과 유럽은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1990년 대비 ○○%'라고 했을까요. 그러다 우리는 어쩌다 2030 NDC를 “2018년 대비 40%”로 정했을까요.
서구 열강들이 기후변화의 심각성, 온실가스 감축의 중요성을 30년 넘게 숨겨오다 이제야 밝혔기 때문일까요. “미국과 유럽이 탄소세를 적용하면 국내 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는 국내 기관의 분석과 언론 보도가 나온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수립하고, 청정에너지 보급을 확대하고, 에너지 저소비형 산업구조로의 전환을 꾀하는 범정부 대책기구”가 처음 만들어졌던 것은 1998년의 일입니다.
이와 같은 온갖 경고와 대책 마련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8년까지 줄곧 늘어만 갔을까요. 30년 넘는 시간 동안 이러한 경고를 무시해오다 이제서야 갑작스런 감축의 부담을 우리 모두가 짊어지게 됐음에도 왜 지금까지 그 책임을 아무도지지 않고 있는 걸까요. 앞으로의 미래 권력은 이제라도 제대로 책임지려 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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