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게 지내던 모 차관이 퇴임하고 갖은 식사자리. 농담처럼 직장 다니는 딸에게 소개할만한 후배 하나 찾아봐달라며 운을 뗐다. 우스갯소리처럼 “기자는 말고...”라는 말을 듣고 ‘진심 부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는 애초에 인기가 없는 직업이다. 조직의 부조리나 타인의 잘못을 탓하는 직업이 인기가 좋을 리 없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집단 증오의 표적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박종철의 죽음도, 최순실의 태블릿도 어느 기자의 한 줄 기사에서 시작돼 우리 현대사를 바꿨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됐을까. 국민들은 왜 ‘기자’란 일반명사에 ‘쓰레기’란 이름을 붙여줬을까.
우리는 ‘분노유발자’다
매일 아침 너무 이해가 된다. 갈라치고 혐오하고 왜곡하고 비호한다. 우리 사회 모든 모순과 부정을 합친 것보다 언론 산업 하나가 더 위악하다는 말도 들었다. 기자란 이제 누군가의 말을 그냥 받아 적는 업이 됐다.
여당 원내대표보다 이상한 평론가들의 말이 더 자주 인용된다. ‘20년 전 한번 국회의원 한 사람’, ‘평생 정치인들 뒤를 따라다닌 난봉꾼’, 또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정치권에서 밀려난 그들’은 시원하게 타 진영을 혐오해준다. 전문 혐오가들의 시대다. 우리는 그들이 인간이 인간을 짓밟는 데서 느끼는 그 배설의 쾌감을 그대로 전한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유발자’다.
‘전남서 동료 여교사 샤워 장면 몰래 촬영한 남교사.’며칠 전 유력 일간지가 네이버 pick에 올린 기사다. ‘여교사’와 ‘몰카’는 우리 언론의 일용한 양식이다. 샤워를 훔쳐본 사건과 전혀 개연성이 없는 지역명을 제목에 명시하고, 이제 댓글은 모두 특정 지역의 혐오로 도배가 된다. 언론은 혐오의 전진기지다.
상대 진영 비판은 그토록 잘하는데 자본 비판은 자취를 감췄다. 자본은 월급을 주기 때문이다. 검색 포털에서 대기업 총수의 연관검색어는 ‘뚝심’이다. 기업의 매출이 늘었거나 특정 제품이 성공한 것은 회장님 때문이라고 기사를 써야 하는데, 논리 연결이 잘 안 된다. 그러니 죄다 ‘회장님의 뚝심’덕분이라는 기사가 쏟아진다(지금 여느 대기업 총수 이름과 뚝심을 검색해보시라).
대우조선 20년차 하청 노동자의 월 소득에는 관심도 없다. 파업을 바라보는 정부와 대통령의 입만 바라본다. 완도에서 죽은 일가족의 행동은 분단위로 분석하면서도, 이 비극을 잉태한 우리 사회의 구멍난 제도는 외면한다. 한 가족의 비극을 애도하는 척하면서 한편에선 조회 수를 끌어올린다. “조유나양 일가족 바닷속으로 차 몰기 전 마지막 말 “이제 물 찼다””같은 기사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내적 완결도 외적 품격도 없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을 서로 베껴 쓴다. 하루에 10개 20개씩 기사를 쓰는 기자가 수도 없이 많다. 일상이 ‘Ctrl + C와 Ctrl + V’이다. 이렇게 컨베이어벨트에서 생산된 기사들을 매일 혐오의 진열장에 펼쳐놓는다. 그렇게 시민들의 가슴을 후벼 판다. 혐오를 양산하고 분노를 강화하고 진영을 선별한다. 그렇게 기레기가 완성된다.
누구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대주주가 대기업인데 대기업을 비판하는 기사를 출고하기는 쉽지 않다. 선진국처럼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민간 언론사는 거의 없다. 삼성을 비판한 출입기자가 교체됐다는 말은 이제 언론계에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네이버와 다음의 기사 독점은 지독하다. 어느 선진국 포털에도 기사 배열로 도배된 초기화면은 없다. 기사를 검색해 줄 뿐 국민들에게 기사를 나눠주지 않는다. 이들 포털은 좋은 기사를 위로 올리는 알고리즘에는 관심이 없다. 열독률이 높은 언론사나 기자에 대한 우대도 없고, 자극적이거나 혐오로 가득찬 기사에 대한 배제 기능도 없다. 덕분에 네이버 창의 명함 크기만 한 창에는 오늘도 낚시용 기사가 가득하다. 그렇게 한번이라도 더 클릭이 돼야 한다. 그래야 네이버에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다.
그 네이버 창안에서 몇 안되는 기사를 팔기위해 밤낮으로 혐오를 전염시켰더니, 기레기라는 혐오가 우리에게 돌아왔다.
‘산복동 코인빨래방’
기자는 망했다. 사회 개혁의 꿈을 안고 언론사 문을 두드리는 젊은이들이 이제 얼마나 될까. 그렇게 들어온 젊은이들이 자본 언론과 진영 언론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모든 환경을 극복하고 만들어진 좋은 기사가 과연 네이버가 정한 7개 기사창 안에 올라 시민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면 우리 언론 생태계는 괴멸할지도 모른다. 뉴스 플랫폼이 바뀌면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기자들의 것이 아니다. 유튜브 등 수많은 정보플랫폼이 우리 직업을 대신한다. 그래도 정론은 살아남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어두운 곳을 비추고, 뒤에 남겨진 자들을 돌보는 시민 사회의 불빛이 꺼지지 않는다면, 그 어느 곳에서든 우리의 역할은 존재하지 않을까.
지난 5월 부산일보 기자들은 산복동 산동네에 코인빨래방을 차렸다.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신 빨래를 무료로 해준다. 젊은 기자들은 취재를 넘어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고 했다.
기자는 원래 듣는 직업이다.
한나 아렌트는 “타인의 처지와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했다. 우리 기사가 엉터리가 된 것은 우리가 보통 사람들의 말에 귀를 닫으면서부터다. 언론이 낙오된 시민에 대한 측은지심 대신, 회장님의 뚝심만 찬양할 때 언론 산업의 자유낙하는 이미 예견된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매일 180개 산동네 계단을 올라 사람들의 말을 듣겠다는 기자들이 있다.
어느 역사의 귀퉁이에서도 언론이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면 조직화된 반지성의 사회가 만들어졌다. 부산일보 젊은 기자들의 분투에서 우리 언론의 희망을 본다. 기자가 필요로 하는 사유의 탁월함은 대부분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과 경험에서 나온다.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자. ‘측은지심’이야 말로 분노와 비판의 본질이다. 그렇게 쓴 기사가 세상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타인의 처지와 고통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래야 죽은 언론이 살아난다. 보통 사람들의 세상사는 이야기가 갈등을 부르는 혐오기사와 광고주를 위한 찬양기사의 멱살을 움켜쥐고 넘어뜨리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한국 언론은 죽었지만 그래서 다시 태어나기 좋은 시간이다. ‘갈등을 풀고 신뢰를 북돋우는 토론장을 제공한다’. 언론윤리강령 제 6조다.
출처: 한국기자협회